분류 전체보기4311 물의 가면 / 김경성 물의 가면 김경성 물속에 갇힌 나무가 있었다물결이 나무를 휘감으며 흘러갔다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가지를 늘어트려서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어떤 말들을 써 내려갔다하냥 물꽃이 피었다 봄부터 품어온 연두가 시간의 켜를 입고 빛을 받은 이파리의 문양은 수만 가지 색을 품고 있었다 물 비침이 없는 날이 많아졌다나무는 얼음판에 먹지를 대고 이파리 한 장 없는 그림자로 길을 찾고 있었다 갇힌 것은 나무가 아니라 강물이었다 천천히 봄이 오고 얼음 가면이 사라지며 출처를 모르는 물길이 숨을 고르면서 나무의 몸속에 있는 푸른 귀를 불러냈다 강가에 수풀이 일어서는 무렵허리가 휜 여뀌꽃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며꽃무늬 낙관을 낭창낭창 찍고 있었다 (월간 2024년 가을호 2024. 12. 19. 칸나의 방 / 김경성 칸나의 방 김경성 붉은 칸나 꽃 색을 다 거두고넓은 잎에 그림자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바람 불 때마다 안개를 묻힌 듯 아득해진다 새 한 마리 검은 그림자를 끌고 왼편으로 날아간다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너무나도 선명한 그림자맑은 햇빛이 태워버렸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는 그저 바라본다 당신은 멀리 있고 칸나는 너무 가까이 있어점점 더 타오르는 칸나의 붉음을 어찌하지 못해치마를 돌돌 말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몸을 잘 접어 키 큰 칸나아래 누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한 생을 다 살아버린 듯칸나 아래 누워서 칸나의 붉음을 입는다달아오른 마음까지도 온통 칸나빛이다 -월간 2024년 10월호 2024. 12. 19. 분절음 / 김경성 분절음 / 김경성 와편에 새겨져 있는 물고기 등뼈가 이지러져 있다 아가미를 드나들던 숨도 지느러미와 함께 사라졌다부레의 힘으로 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는 물고기의 집은 물속이 아니었다 몇 장 남아있는 비늘을 지문처럼 지층 속에 넣어두고오랫동안 저 자리에 있다 흩어져 있는 조각을 보며 누군가의 집이었다고 예감할 뿐사용흔으로 내력을 다 읽기에는 시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뼈가 시큰거린다, 짜 맞추어져 있던몸의 언어가 해체되는 중이다 뼈마디 사이에 둥근 집이 있어서 몸을 비틀 때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어긋난 뼈를 추스르며 흩어져 있는 조각을 맞춰본다기울어진 내 그림자가 비어있는 퍼즐을 덮으며 한 풍경이 된다 어골무늬 선명한 와편 하나를 몸에 끼워 넣는다흩어졌던해체되었던문장이 하.. 2024. 12. 19. 씨가시 올금 연지 */ 김경성 씨가시 올금 연지 */ 김경성 소주됫병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끊어낼 수 없는 유전자는 언제나 대기 중이고마음속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저 비의를예측할 수 없어 아득하다 숨길을 막고 있는 병마개는 언제쯤 열리나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백 년 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이작은 풀꽃이 세상을 끌고 왔다 잘 영근 씨앗을 병 속에 넣어두고봄을 기다렸던 사람은 꽃봄을 만나지 못하고 먼 길 떠났다 당신의 심장에 손을 대면 두근거림이 전해오듯이씨앗을 넣어두고 말문을 닫은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그 마음 알고 싶어 병 속 깊이 들여다보며 씨눈을 찾아본다 봄이 오면 가득히 피어나고 싶어서단단하게 몸을 여민 씨알들개밥바라기별 옆에서 잠에 들면 꽃이 피어나는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 씨앗은 병속에 갇혀 있고씨.. 2024. 12. 19. 나의 이름을 지우고 / 김경성 나의 이름을 지우고 김경성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어느 먼 곳에 있는 이름을 가져와야 하나요 폐사지에서 몇 백 년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5층석탑이라고 써도 될까요 화르르 바람에 물려 입술문자를 쓰는 꽃잎이 되어 시간을 잃고 함께 흘러가는 오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 앉아 바라보는 탑 너머로 펄럭펄럭 낮게 날아가는 쇠백로처럼자꾸만 어딘가로 흘러가는 마음 움켜잡았습니다 무릎 꿇고 엎드려서 바라보는 꽃황새냉이는왜 그렇게 흔들거리는지요탑돌이를 하던 사람들의 마음 소리를 들었던탑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습니다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하고정거장 이정표도 없는 갓길에서 너무 늦게 오는 버스를 타고낯선 마을 모퉁이를 돌 때마다예감처럼 보이는 그 무엇을 보고는어떤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았습니다 (66한국시인> 2024년 .. 2024. 12. 19. 늙은 말 / 김 윤 늙은 말 김 윤 말은 이미 늙었고 진흙탕 속에 서서 비를 맞았다젖은 속눈섶을 떨고 있었다 동네 끝에 말집이 있었다우리는 마구간 앞에 서서 말을 쳐다보는 일이 많았다 종일 수레에 장작을 실어 날랐다길에 멈추어 서면 채찍으로 맞았다 말은 서서 잔다자는 말에게 남자애들이 돌을 던졌다 나는 눈을 가리고 울었다 그 옛날 늙은 암말이 내 속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말은 무릎이 아프구나아직도 비를 맞고 있구나 나는 다 잊어버렸다늙은 말은 지름길을 알아서 말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 ―계간 《시와 함께》 2024년 겨울호------------------김윤 /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지붕 위를 걷다』 『전혀 다른 아침』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등. 2024. 12. 17. 12월의 귀 / 심재휘 12월의 귀 심재휘 귀를 베고 잤더니 귀가 아팠다12월의 소식도 아팠다오른쪽 귀를 베고 자면 당신이 아팠고왼쪽 귀를 베고 자면 새벽달이 아팠다 담요처럼 얇게 펴지는 어둠을추운 마음에 덮을 수는 없어서모로 누우면 뒤척거리는 밤이 되었다펴진 귀는 편해진 귀가 되어도당신의 모습은 아픈 귀에만 모였다 밤을 온몸에 묻히고 죽은 듯이 있어도 12월은 간다해가 바뀐다 해도 빈자리는 여전히 먼 곳이고귀는 아픈 방향을 달고 있도록 태어나제자리로 오래 가야 할 하현은 조금 더 해쓱해졌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24년 가을호---------------------심재휘 / 1963년 강릉 출생.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2024. 12. 17.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외 2편) / 고 영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외 2편) 고 영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꽂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가출 아주 평화롭게식탁 위에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다접시 속에 살던 새 한 마리.. 2024. 12. 9. 문장(紋章) / 서영처 문장(紋章) 서영처 몸 밖으로 가시를 발라낸 장미는활어처럼 고운 살냄새를 풍긴다얼룩이라곤 없는 뽀얀 꽃이 피어난다식탁 가장자리 비싼 접시처럼 향기를 뿜어낸다장미의 문장을 쓰는 가문이 있었다장미의 생 이면에 창과 방패가 꿰어져 있듯나의 생 이면에 승자와 패자의 기승전결이녹슨 칼처럼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것 같다비는 종종 학생들이 시험지를 채우느라다급하게 펜을 두드리는 리듬을 포획해 온다허기진 닭들이 정신없이 모이를 쪼아먹는 소리와 흡사한때로 경기병들의 말발굽 소리를 강탈해 오기도 한다비를 맞은 이파리는 찢긴 영수증 조각처럼 흩어진다장미에 대한 어떤 예우도 없는 하루비에서는 먼 항구의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계통수를 거슬러 올라가도 장미 속에는 어류가 없고또 다른 장미가 있고나아갈 수도.. 2024. 12. 9. 풍등(風燈) / 강인한 풍등(風燈) 강인한 그대의 손이 사라진다.전 생애의 적막이 사라진다. 제 뿌리를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려나무들이 배경에서 떠나가는 시절이다. 어두운 하늘 속저마다 혼자씩 사라진다.그대의 손이 내 비루한 추억을 뿌리치고사라진다. 어두운 하늘 속을하늘보다 더 어두운 마음 안고이승엔 듯 저승엔 듯낙엽이 진다. ―시집 《장미열차》 2024 《불교평론》 2024년 여름호 2024. 12. 9. 이전 1 ··· 5 6 7 8 9 10 11 ··· 4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