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紋章)
서영처
몸 밖으로 가시를 발라낸 장미는
활어처럼 고운 살냄새를 풍긴다
얼룩이라곤 없는 뽀얀 꽃이 피어난다
식탁 가장자리 비싼 접시처럼 향기를 뿜어낸다
장미의 문장을 쓰는 가문이 있었다
장미의 생 이면에 창과 방패가 꿰어져 있듯
나의 생 이면에 승자와 패자의 기승전결이
녹슨 칼처럼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것 같다
비는 종종 학생들이 시험지를 채우느라
다급하게 펜을 두드리는 리듬을 포획해 온다
허기진 닭들이 정신없이 모이를 쪼아먹는 소리와 흡사한
때로 경기병들의 말발굽 소리를 강탈해 오기도 한다
비를 맞은 이파리는 찢긴 영수증 조각처럼 흩어진다
장미에 대한 어떤 예우도 없는 하루
비에서는 먼 항구의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
계통수를 거슬러 올라가도 장미 속에는 어류가 없고
또 다른 장미가 있고
나아갈 수도 돌아올 수도 없는 미로를 만들고
장미는 요구한다 헌신과 서약을
양손 양발에 침을 꽂고 잠이 든 사람
신호등이 바뀐 듯 피어난다
―계간 《가히》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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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처 /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 2003년 계간 《문학/판》으로 시 등단. 시집 『피아노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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