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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2세 외 9편 / 나의 대표시_ 강인한

by 丹野 2024. 12. 9.


나의 대표시_ 강인한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2세 외 9편



삼천 년도 훨씬 지나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
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
스쳐 가는 존재들,

철없는 것들,
공포의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으리.
아랍 놈들이 코를 뭉개고, 영국 놈들이
수염과 턱을 깨부수고 마침내
스핑크스는 눈도 빠지고 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돛배를 타고 이승, 저승을 오가는 검은 태양.

한 나라의 역사란
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
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
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
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저것은 일찍이
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트랩이 내려지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팡파르,
공항이다.
엄정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나는 아부심벨에 두고 온 사랑을 생각한다.
불타버린 심장으로 느낀다.

전쟁에 이겨야만 남의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오벨리스크가 침묵으로 말한다.

이곳에서 나는 이집트의 파라오,
까마득한 이방의 시간과 대지 위에 서 있다.
                                                                     (2019 시인수첩 여름호)



신들의 놀이터



태초에 말씀이 있어도 좋고
장엄한 노을 아래 배경음악을 까는 것도 좋겠지
삼면을 장벽으로 세우고
한쪽은 바다가 좋아 평화로운 바다 지중해

대낮의 길거리 아무 데도 도망칠 곳이 없는 거리에
아이들이 달리면서 손을 흔들어
날아오는 비행기를 향해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하마스의 로켓탄을 던져봐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화우라늄폭탄도 몇 개
백린탄은 반짝반짝 폭죽처럼 아름답지
밤의 커튼 아래로는 신성한 달빛을 좀 흘려줄까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
철근이 꽃대처럼 목을 뽑아 내다보는 거기
어린 사내아이의 연한 뱃가죽에서
삐져나온 창자를 물고 가는 개
포도알처럼 달콤한 소녀의 눈을 파먹는 쥐들

끔찍하게 즐거워서 으스스 소름이 돋는 놀이터
이 풍성한 성찬에 당신들을 초대하고 싶어
유서 깊은 원한을 그윽한 향불로 피우며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봐, 붉은 피와 흰 뼈가 검게 타고
증오가 다윗의 별로 빛나는 그곳.
                                                     (2009년 3월호 현대시학)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이른 아침 갓 구운 핑크의 냄새,
골목길에서 마주친 깜찍하고 상큼한 민트 향은
리본으로 치장한 케이크 상자처럼 궁금한 감정이에요.

초보에게 딱 맞는 체리핑크는
오전 열 시에 구워져 나오지요.
십대들이 많이 구매하지만 놀라지 마셔요, 때로는
삼사십대 아저씨가 뒷문으로 들어와 찾을 때도 있어요.

육질 좋은 선홍색의 연애는
오후 두 시 이후에 뜨거운 오븐을 열고 나와요.
구릿빛 그을린 사내가 옆구리에 낀 서핑보드
질척거리는 파도 사이 생크림 같은 흰 거품은 덤이지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 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가장 멋들어진 연애는 한밤의 트라이앵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라지는 삼각관계로 구워내
당신의 눈물에 찍어먹는 간간한 마늘빵 그 맛이지요.
                                                                                   (2010.5.27 문장웹진)



발다로의 연인들



독화살이 심장을 파고들어 마침내 숨을 끊은
콸콸 더운 피를 끄집어낸 곳, 여기쯤인가 부러진 뼈 한 도막
몇 날 몇 밤의 증오를 순순히 받아들인 곳
피는 굳고, 벌들이 찾던 꽃향기는 언제 희미해진 것일까

부릅뜬 눈으로 빨아들인 마지막 빛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 햇빛보다 부신 웃음이었다
껴안은 팔에서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흙덩이
잘 가라, 우리들 포옹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여
눈보다 희고 부드러운 시간들이여

꿀처럼 달고 보드라운 당신의 입술은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 만토바의 하늘을 스치는
한 덩이 구름, 한 줄기 놀빛으로 산을 넘어
서늘한 밤의 대기가 되고
내 온몸을 거울처럼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벌써 여름밤 별자리로 찾아가 맑게 빛나고 있거니

부패라는 것, 오 망각이란
가시 많은 사람살이에 얼마나 고마운 벗일 것인지
오랜 망설임 끝에 다가가서
한 점 한 점 불타는 기쁨으로 땀 흘리던 육체는
기꺼이 벌레의 밥이 되고 다시 흩어져 희미한 슬픔으로
흐르다 올리브나무 수액이 되고, 더러는 바람에
무심한 바람에 팔랑이는 올리브나무 잎새가 되었다

잠도 천년, 다시 또 몇천년이 꿈결 같았다
무서운 살육의 전설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수많은 파란이 지나가고 난 뒤
문득 깨어난 아침이 웬일인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침묵으로 말하노니
손대지 마라, 우리들 기나긴 사랑의 포옹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곳, 빗발치는 편견을 법으로 세우는 곳이라면
우리 이대로 다시 몇 천 년이라도 견디고 견딜 것이니.
                                                                                    (2009. 3/4월호 유심)



강변북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2011년 5/6월호 유심)



빈 손의 기억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2005년 10월호 현대시학)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은빛 서걱이는 강변에
바람 부는 갈밭, 검은
달이
애드벌룬처럼
기나긴 쇠사슬 끝에 매여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갈대는 여기저기서
단칼에 허리가 꺾인다.
허리 아래 드러난
복두장이의 피 묻은 너털웃음이
비비꼬여 달아난다.
쇠사슬을 절컥이며 절뚝절뚝 달아난다.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앙금으로 남은 귀엣말
시퍼렇게 녹이 슬려 인양된 뒤.
                                                 (1980년 4월호 현대시학)



램프의 시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마음이 마른 붓끝처럼 갈라질 때, 램프에 불을 댕기십시오. 그러면 오렌지 빛깔의 나직한 꽃잎들은 하염없이 유리의 밖으로 걸어나오고, 어디선가 문득 짤랑거리는 금방울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희미한 옛 성이 흘러나오고 그 속에서 장난감 말 두 마리가 청색의 어둠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것을 당신은 또 보실 수 있습니다. 검은 갈기를 물결치며 물결치며 달려오는 이 작은 쌍두마차의 뜻하지 않은 출현에 몇 파운드의 눈발조차 공중에 튀고 있습니다.

   램프에 불을 댕기십시오. 어둠에 얼어붙었던 모든 평화의 장식물들을 그래서 훈훈히 녹여주십시오. 성에가 끼기 시작하는 유리창에는 알 수 없는 나라의 상형문자가 나타나 램프의 요정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비단뱀이 땅속에서 꾸는 이 긴 겨울밤의 천 가지 꿈에 대해서, 에로스가 쏘아부친 보이지 않는 금화살의 행방에 대해서, 아아 당신 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줄 것입니다. 램프의 요정을 찾아오는 어떤 바람결에는 당신의 이름이 섞여서 나부끼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램프에 불을 댕기십시오. 일에 시달려 당신의 온몸이 은박지처럼 피곤하여질 때, 뜨거운 차라도 한 잔 끓이고 있노라면 아주 먼 데서 미다스 왕의 장미꽃들이 눈 속에서 무거운 금빛을 툭툭 터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찻잔 속에 피보다 진한 밤의 거품이 가라앉고, 당신의 부름에 좇아 그리운 흑발의 머리칼이 떠올라선 어두운 당신의 얼굴을 포근히 감싸줄 것입니다. 찻잔 밖으로는 돛대를 높이 단 배 한 척이 눈보라 속을 홀린 듯 흘러나오고, 고운 가락의 옛 노래와 같이 어떤 두 사람의 끝없는 발자국이 먼 해안의 모래밭 속에 가만가만 감춰지고 맙니다.

   끊을 수 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영혼이 끓어오를 때 램프에 불을 댕기십시오. 그 조용한 불길의 칼에 지나온 눈물을 더하십시오. 그러면 고요의 은빛 바다가 말없이 열리고, 빨간 루비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가슴 설레며 몰려가 저마다의 정다운 꽃등을 높이 든 채 바다로 나가고……. 아 그럼 사랑하는 이여, 당신도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의 램프를 밝혀 들고 조용히 흔들어주시렵니까. 꺼지지 않는 루비의 램프를.
                                      (1969.12.17) 시선집 『어린 신에게』 1998.5


불길 속의 마농



어지러워요 저 불길
당신의 사랑은 너무너무 높아서 어지러워요
저 불길을 누가 좀 잡아줘요
어려요 저는 어리고 당신은 높으신 분
말 많은 당신을 누가 사랑해요
사랑해요
잊어버리세요 저것들
거렁뱅이들의 소동쯤 당신의 거대한 배짱으로
밀어버려요 불도저로 밀어버려요
까짓 양복점 직공의 항변쯤 눈감으면 그만
벗어놓은 제 브래지어로 차라리
눈을 가리세요
보지 마세요 듣지도 마세요
무시해 버려요 말짱 미친놈들만 박테리아처럼
박테리아처럼 우글거리는 이 도시의 공기는
담배보다 해롭고
구 할이 외상이에요
타네요 이 시디신 공기
악질의 근성 근대식의 멋진 연애가
아주 잘 타네요
늦잠 자던 산타클로스가 저 봐요
뛰어내리네요 나비처럼 사뿐히
불길 속을 뛰어내리네요 자꾸만 자꾸만
어지러워요 어려워요 어려요
절 놓아주세요
닥치는 대로 부수고 닥치는 대로 세우는
미끈한 당신의 폭력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속고 또 믿어요
믿을 수 없어요
놓아주세요 절 좀 놓아주세요
이렇게 높은 창틀에 올라서면
저는 여왕이에요 난초 열 끗이에요
뛰어내릴 테요 금리처럼 단호히 내릴 테요
아주 잘 타네요 저 불길 잘 타네요
함부로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누가 듣고 있어요
이 도시는 빈 놋그릇처럼 울려요 날마다
꽝꽝 울려요 하늘도 땅도
울려요 어지러워요
어디서 오셨나요 당신의 유니폼이 겁나지만
뭘 드시겠어요 총을 들고 버티겠어요
저는 당신의 포로 그래요 마농이에요
주간지에서 절 보셨다구요 아이 기뻐요
밤이 되면 전화를 걸어주세요
저기 오빠가 달려와요
절 죽이러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어요
어지러워요 막 타네요 저 불길
농축된 당신의 욕망이 프로판가스처럼
치솟아 오르면서 타네요
세계에서 제일 쓸쓸하고 화려한
돈 돈 돈자천하지대본이 타네요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요 저 불길
붙잡아주세요 아무도 없나요
                                                   (1972년 4월호 현대시학) 1972.1.22 완성. '.현대시학 특집 / 60년대 50人集'


1965


  1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겨울은 점령군처럼 급히 왔다.

  2

부러울 게 없어야 할 시절에
교정에서,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서 모표를 반짝이며
애당초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몰래몰래 막걸리를 마시더니
무섭게 자라버린 그 친구가
애당초 글러먹은 나라의 특등사수가 되어
터지는 포화 속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친구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를 떠난다 해도
하나 안 기쁘고 하나 안 슬픈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하나도 하나도 안 기쁜 환송을 받으며
친구는 웃었다.

  3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똥에 짓눌렸던 게지.
짓눌려 터지는 소리가 우리들의 방
문풍지를 울렸던 게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사랑하는 친구가 젊디젊은 나이를 총구에 달고
가버렸을 때,
겨울은 무심히
우리들의 텅텅 빈 가슴에 무심히
겨울은 닻을 내렸다.

  4

칫솔에 묻어난 피를 닦는 일상의 어느 아침
문득 받아든 에어 메일,
친구의 얼굴이 두 손바닥으로 감쌀 수 있는
그래서 안녕이 더 그리운 수만리 밖의 체온
체온을 만질 수 있는 문명을
감사해야 할까,
날아온 친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는, 하늘이 뜻한다면
고향 집 마당도 쓸고
보리밥 된장찌개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낯선 바람에 깎여 코가 커지고 눈알이 파래진다고
사랑하는 친구는 웃고 있지만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5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겨울이
우리들의 내장 속에서 정박을 하고
우리들은 지금, 글러먹은 땅에서 어차피 굴러먹는다.
창자 속에 얼어붙은 겨울을 꺼내어
개선장군처럼 웃는다.
산다는 것이 즐거워서 웃는다.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6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우리가 떠나온 그 교정의, 그 미루나무 아래에선
우리들의 동생이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마시며
아, 무섭게 자란다.
미루나무는 이파리도 없이 무섭게 자란다.
                                                                    (1965.11.15) 〈전북대학신문〉 1965.12.15




     —계간 《시와 반시》 2024년 겨울  Vol.130


ㅡ출처 / 푸른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