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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60

와온臥溫 / 김경성 와온臥溫 김경성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멈추는 곳이 와온(臥溫)이다 일방통행으로 걷는 길 바람만이 스쳐갈 뿐 오래전 낡은 옷을 벗어놓고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곁을 지나서 해국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바람이 비단 실에 묶여서 휘청거리는 바람의 집으로 들어선다 눈가에 맺힌 눈물 읽으려고 나를 오래 바라봤던 사람이여 그 눈빛만으로도 눈부셨던 시간 실타래 속으로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만이 아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날줄에 걸쳐 있는 비릿한 추억, 삼키면 울컥 심장이 울리는 떨림 엮어서 갈비뼈에 걸어놓는다 휘발성의 사소한 상처는 꼭꼭 밟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너무 깊은 상처는 흩어지게 펼쳐놓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집 네 가슴 한껏 열고 들어가서 뜨거운 기억 한 두릅에 그대로 엮이고 싶은.. 2021. 1. 18.
직립으로 눕다 적립으로 눕다 김경성 빗방울에 눌려 떨어져도 고요하다 소리 지르지 아니한다 입술 같은 꽃잎, 조금이라도 넓게 펴서 햇빛 녹신하게 빨아들여 몰약 같은 향기 절정일 때 바람에 날린다 해도 서럽지 않다 직립의 시간 허물어뜨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눕는다 목단꽃 떨어져도 넓은 꽃잎 접지 않는다 꽃대에서 그대로 시들어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꽃이어도 먼 곳까지 날았던 그림자의 기억이 있다 향기 환장하게 번져나는 꽃나무 아래 서서 꽃물 배이도록 젖어들다가 아, 나도 한 장의 꽃잎이 되어 네 꽃잎 위에 눕는다 포개어진 꽃잎 위로 스쳐가는 바람 부드럽다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2021. 1. 18.
날카로운 황홀함 날카로운 황홀함 / 김경성 운주사 와불을 보려면 와불 옆에 있는 소나무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낮은 산봉우리에 몸을 올려놓은 지는 해가 아니어도 와불의 등 뒤로 가만히 손을 넣은 소나무의 손이 왜 따스한지, 핏줄이 서도록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는지 여백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몸 위에 쏟아지는 햇볕 그대로 껴안고 가만히 누우면 흘러가는 시간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나무의 손 위에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치맛자락이 날리면서 제 그림자도 와불의 옷자락에 걸렸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흩어지는 말보다도 마음속에 잠겨 있는 보이지 않는 법문이 듣고 싶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들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발자국 무늬 겹겹이 쌓여 탑이 되고 나무와 새들의 소리는 물 흘러가는 소리 같았습니다 어느 해 씨앗이었나.. 2021. 1. 18.
오래된 그림자 -관룡사 당간지주 관룡사 당간지주 / p r a h a 오래된 그림자 / 김경성 -관룡사 당간 지주 시간이 흘러가도 차오르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의 흔적만이 켜켜이 쌓여갈 뿐 해체할 수 없는 기억은 읽을 수 없는 암각화처럼 쓸쓸하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심지를 꽂았던 가슴에는 우물 같은 자국이 있다, 그 너머로 조금씩 무너져가는 오래된 탑과 빛과 바람이 스칠 때마다 기억을 지워가는 벽화의 채색 빛처럼 대웅전 어칸 문의 경첩이 기억하고 있는 문이 열리고 닫혔던 숫자만큼 제 몸을 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슴 안으로 물컹하게 들어갔던 것, 혹은 빠져나왔던 것 흔적으로 남아 뚫린 가슴 너머로 바람 흘려보내며 푸른 깃발을 기다리고 있다 허물어져가는 시간의 눈금 위에 서서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온 몸에 푸른 꽃.. 2021. 1. 18.
나무의 유적 사진출처 / 동산 최병무시인님 블로그 나무의 유적 / 김경성 얼마나 더 많은 바람을 품어야 닿을 수 있을까 몸 열어 가지 키우는 나무, 그 나뭇가지 부러진 곳에 빛의 파문이 일고 말았다 둥근 기억의 무늬가 새겨지고 말았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어서 끌고 가야만 하는 것 옹이 진 자리, 남아있는 흔적으로 물결무늬를 키우고 온몸이 흔들리도록 가지 내밀어 제 몸에 물결무늬를 새겨넣는 나무의 심장을 뚫고 빛이 들어간다 가지가 뻗어나갔던 옹이가 있었던 자리의 무늬는, 지나간 시간이 축적되어있는 나무의 유적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무늬의 틈새로 가지가 터진다, 잎 터진다, 꽃 터진다 제 속에 유적을 품은 저 나무가 뜨겁다 나무가 빚어내는 그늘 에 들어앉은 후 나는 비로소 고.. 2020. 11. 8.
견고한 슬픔 견고한 슬픔 / 김경성 -폐염전 水東里産 쌀포대 한 달째 따순밥 풀어놓더니 축 늘어져 있다 무언가를 담고 있었던 것이나, 떠나고 난 자리는 왜 저리도 깊은 주름이 새겨지는 것인가 그대 내 안으로 들어와 훑고 앉은 자리 듬성듬성 잘려나가 절망이어도 철철 넘치게 드나들던 수많은 자국 기쁨은 기쁨으로 절망은 절망으로 절여져서 주름이 지고 말았다 꺾이여진 바람의 날개가 쌓여 갯바닥에도 물결무늬 졌다 몇 장 남지 않은 함석지붕 골마다 갯바람 고여 흘러내린다 바람 불어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풍경들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함께 넘어졌다 바람의 깃털로 주름진 가슴 가만가만 쓸어내려도 싸르라니 내 속이 아프다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2020. 11. 8.
어느 나무에 관한 기록 두물머리 느티나무 어느 나무에 관한 기록 / 김경성 슬픔이 깊을 때에는 등뼈를 구부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슬픔이 잦아들기도 한다 한겨울 빈 가지로 서 있던 두물머리 느티나무, 한여름 해질 무렵에 닿았다 느티나무의 몸이 둥근 내 등뼈 같아서 왈칵 눈물이 났다 느티나무의 몸속에 새집이 있다면 부레일 것이다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간절함이 새의 부리에 닿아 둥근 집을 짓게 했다 느티나무의 전생이 물고기였다는 것을 나는 안다 몸속으로 바람을 들이는 저 나무도 바람의 결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탓에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슬픔이 깊어질 때마다 푸른 비늘 틔워서 둥근 등뼈를 만든다 슬픔이 녹아 기쁨이 되는 어느 가을쯤 비늘 한 장 한 장 물 위에 띄워 보내며.. 2020. 11. 8.
가오리가 있는 풍경 가오리가 있는 풍경 / 김경성 하루 종일 오는 사람 없는 어촌 바닷물 들어오지 못하게 돌담을 쌓아놓았다 파도소리 달치게 끌고 와서 쏟아놓던 갯바람 그냥 가기 섭섭했는지 마당 몇 바퀴 돌다가 나간다 장대 끝에 걸려 있는 마른 가오리 몇 마리 지느러미 흔들어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파도소리 크게 울릴 때마다 하늘 복판으로 들어가 첨벙거린다 집게에 물린 어린 빨래들 물방울 튕기며 뜀뛰기하고 대문 옆 사철나무 물풀처럼 흔들거린다 쇠줄로 매어놓은 눈 먼 개 한 마리 엎드려서 물끄러미, 가오리를 좇고 있다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2020. 11. 8.
맷돌 맷돌 / 김경성 왜, 너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것들은 모두 가루가 되거나, 즙이 되거나 덩어리 하나 없이 그렇게 다 부서져 버리는지 몰라 슬픔이 너무 커서 무언가를 부서뜨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 가루가 되지 않거나, 즙이 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들은 너무 깊은 상처 덩어리이거나 처음부터 네 마음의 입구가 어디인지 모르고 덤볐기 때문이지 단단하게 옭아맨 어처구니 붙잡고 마음 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다 보면 슬픔도 가벼워질 적이 있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든가, 쓸쓸함 같은 것 때로는 덩어리 째 꿀꺽 삼키고 폭탄 같은 너의 가슴에 기대어서 무작정 함께 빙글 빙글 돌고 싶어 슬픔이 섞여서 가벼워질 때까지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2020. 10. 5.
저수지의 속 길 저수지의 속 길 / 김경성 왜, 그 순간 물 빠진 저수지의 속 길이 생각났는지 몰라 가뭄 끝,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 각질이 일어난 저수지의 발바닥쯤이었을까, 지문이 다 지워진 손바닥이었을지도 모르지 저수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던 거야 목젖 근처에서 뻗어나가는 길 강둑까지 이어져 있었지 물속에 잠겨 있는 동안 그가 걸어 다녔던 길이었을까 둑에 갇힌 채 제 속에 담긴 것들의 전생을 읽거나 한없이 뛰어드는 붙잡을 수 없는 것들 끌어당겨서 길의 끝에 올려놓았을지도… 이른 아침 부리를 씻어내는 새들이 먼 곳에서부터 그어놓은 어떤 기류의 끝자락이며 어린 새들의 처음, 목을 적시는 저수지 안쪽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는 길의 끝이 아니고 길의 시작이었으니 모든 것 다 퍼내고 아프게, 제 속의 것 다 드러내야 .. 2020.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