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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60

응고롱고로* 응고롱고로* 김경성 응고롱고로에는 매장당하지 못하고 풀밭에 그림자 늘이고 있는 짐승의 뼈가 있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초원을 달렸을, 그러나 지금은 목덜미에 깊은 상처를 입고 다리가 찢겨 속도를 잃어버린, 더 이상 바람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빛도 감지하지 못하는 어린, 임팔라를 물고 하이에나 한 마리 물가로 걸어오고 있다 죽음과 생을 잇고 있는 심줄 끊으려고 욕망의 칼날 얼마나 세웠을까 핏빛 흔적 지우려 진흙탕 속에 뒹굴어보지만 죽음의 냄새는 사라질 수 없는 법, 독수리 두 마리 임팔라 위를 맴돈다, 햇빛은 강렬하다 하이에나 목덜미에 묻어 있는 핏물 또한 진하다 플라밍고 떼, 내리꽂히는 빛줄기 깃털에 꽂고 물기 잃어가는 호수 부리에 물고 있다 타조가 쏟아놓고 간 둥근 알 풀밭에 박혀있다 깃털 푸른 새, .. 2020. 10. 5.
통명痛鳴 보광사 만세루 / 프라하 통명痛鳴 / 김경성 1 보광사 만세루에 앉아 몸의 비늘을 모두 벗겨내고 목어 뱃속으로 들어갔다 비릿하게 흘러가는 것들 숨 잦도록 되새김질하면서 제 몸을 나누어서 창살이 되는 나무는 빛과 바람으로 세상을 넘나들고 제 속을 아프게 파내고 북이 되는 나무는 온몸으로 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창호지 바른 산, 겨울 볕에 탱탱했다 새들은 고사목 껍질 속의 유충을 삼키며 나무의 흰 뼈에 부호를 쓰는지 텅텅 텅 텅 소리로 산문을 흔들고 목어의 몸을 빠져나온 나는 돌아올 발자국을 남기며 길을 걸었다 3 새들은 어떤 슬픔이 있어 죽은 나무의 잠을 깨우고 죽어도 죽지 않는 나무는 온몸으로 울음 쏟아내는가 나무의 몸을 빌려 집을 짓고 살았던 새들은 아직도 떠나지 못한 채 바람의 행로를 타면서 죽.. 2020. 10. 5.
쓸쓸한 생 쓸쓸한 생 / 김경성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가까이 있던 것들이 멀어져갔네 종아리를 스치던 미루나무 우듬지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도 이제는 닿을 수 없는 허공 비에 적신 머리채를 흔들거나 제 키보다 더 긴 그림자를 들었다가 놓네 소꿉친구는 기차를 타고 떠났네 화사花蛇가 벗어놓은 흰 허물 펄럭거리는 자리마다 푸른 잎을 부르는 석산화 울음 끝이 붉었네 청어를 사러 간 아버지는 둥근 집으로 들어간 후 대문의 빗장을 여우 콩 줄기로 닫아걸었다네 해질 무렵이면 청어를 굽는지 산자락이 자욱하네 씨앗 터지듯 몸을 뚫고 나온 아이들마저 더는 내 팔을 베고 잠에 들지 않는다네 수저를 들었다 놓으면서 한 모금씩 마신 물이 가슴 가득히 차올랐는지 이마에는 물결무늬가 새겨졌네 접속하지 못하는 내 안의 나마저 낯선 내가 되어 .. 2020. 10. 5.
새들은 왜 부리를 닫고 날아갔을까 간덴사원 천장터 / p r a h a , 2007년 새들은 왜 부리를 닫고 날아갔을까 -간덴사원 천장터 김경성 아직 어둠 채 가시지 않은 조캉사원 바코르 광장 룽다를 건네는 사람들의 눈이 맑다 새벽빛 들어 올리는 라싸강 황금빛 그물 드리우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빛나는 말들을 걸러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을 이 세상에 쏟아 놓았는지 오색빛 룽다, 실타래처럼 풀어졌다 백양나무 건너 유채꽃밭 뛰어넘어서니 굽이굽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 설산 너머 며칠 전 구름 뚫고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가 있다 간덴사원 천장터, 잿더미 속에서 찾아낸 사람의 뼈 몇 조각 남겨놓고 싶은 그 무엇이 있어서 새들은 부리를 닫고 날아갔을까 새의 몸을 빌려 하늘로 오르지 못한 뼛조각의 날개 펴는 소리 천.. 2020. 9. 15.
꽃잠 꽃잠 / 김경성 문이 닫히는 바람의 저녁이 오기 전, 휘어진 회화나무와 마가목을 지나서 산사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속을 비운 채 껍데기의 몸으로 백 년도 넘게 사는 귀룽나무 두 그루를 만날 수 있다 하나인 듯 밑동이 붙었지만 서로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햇빛 퍼지는 쪽으로 가지 내려놓고 있다 몸 휘어지도록 숨구멍이 있는 곳마다 흰 꽃 실었던 그들은 다른 나무보다 일찍 잎을 틔우고 너무 많은 꽃을 피운 탓에 허기져서 일찍 잎 내려놓는다고 한다 두 그루의 나무가 제 속엣것 모두 퍼내서 수많은 꽃망울 잉태하고 몸 밖으로 검은 열매 가득히 쏟아냈으니, 한철 휘어질 듯 꽃송이로 온몸을 덮는 꽃피는 일이 생의 기쁨이었으니, 속이 텅 빈 등뼈만으로도 속 뿌리 엉긴 채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인 듯 살아.. 2020. 9. 15.
솟을연꽃살문 사진 / Daum 이미지 솟을연꽃살문 / 김경성 소금쟁이 올려놓은 그의, 몸 가운데 마음 내려놓고 가만히 다가가는 개구리밥 둥글게 퍼지는 무늬 중심으로 들어가 보니 잎 넓은 연잎이 쏟아내는 눈물이었다 굳게 잠가두었던 연못의 꽃문 조금씩 열고 있다 바람의 치맛자락 그의 가슴에 걸렸는지 제 몸을 둘둘 말아서 함께 뒹굴며 가슴 뚫고 뿌리 내린 독새기풀과 왕골의 곧은 몸까지 모두 받아들인다 제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흔들리고 흔들리는 물의 몸, 가만히 덮어주던 연잎 제 마음인 듯 쑤욱 꽃대 올려놓더니 봉긋거린다 솟을연꽃살문 열렸다 2020. 9. 15.
깊고 두꺼운 고요 깊고 두꺼운 고요 김경성 고요의 깊이가 너무 두꺼워서 오래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의 숨결 같은 바람 하느작거리며 감또개 몇 개 발밑에 떨어뜨려 놓고 새들의 목젖을 만지작거리는지 놀란 목어 흠칫 거린다 저만치의 거리에 앉아있는 사람,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리는 저, 오래된 나무의 부드러운 몸짓 그림 속에서도 흔들거린다 그는 나무를 그리고 나는 마음의 붓으로 먹빛 문장을 그렸다 낯선 그와 나 사이의 행간을 뛰어넘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바람마저 맥을 놓았다 한 그루의 나무가 화선지 속으로 온전히 들어갔을 때쯤 내 마음속의 나무도 뿌리를 깊게 내렸다 깊고 두꺼운 고요 쪼개어서 잘 익은 부도탑 몸빛 덧칠하며 날아가는 나비 그림자, 그대인 듯 가슴으로 받아냈다 서어나무 곁을 지나고 늙은 굴참나.. 2020. 9. 15.
나무는, 새는 나무는, 새는 / 김경성 차르르르 키질하듯 새떼 날려보내는 버드나무 수십 마리 쏟아내고 난 후 바르르 몸을 떨다가 새들의 발자국 가지런히 정리하는지 한참이나 뒤척거렸다 강아지풀 옆에 앉아서 사과 한 개를 다 먹을 때까지 제 속에 품어놓은 새들을 몇 차례 더 날려보냈다 파라라라락 새들은 날아가고 새가 앉았던 자리마다 듬성듬성 생긴 구멍 초가을 볕 날쌔게 꿰차고 앉아서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가슴을 열어놓고 품었거나, 날려보냈거나 새들의 징검다리가 되었거나 흔들거리며 제 자리에 서 있는 저, 나무의 탄력성 나뭇가지 튕겨서 새들을 쏟아낼 때마다 마른 새똥 떼어내듯 나뭇잎 흩날렸다 새들을 품을 때는 오롯이 나뭇잎으로 덮었다 나무는, 새는 한몸이었다가 남남이었다가 새들은 허공에 길을 그리고 나무는 제 몸 그림자로.. 2020. 9. 15.
이끼 이끼 / 김경성 그만큼의 거리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디여도 몸 내려놓을 자리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 가장 가벼운 몸으로 골짜기 그 너머까지 썩은 나무의 등걸을 지나 동굴 속까지 너른 바위 안쪽까지 철퍽철퍽 미끄러지는 물 잔등이어도 마른 입술 툭툭 터지도록 긴 가뭄이어도 몸 깊숙이 남겨놓은 자리가 있어 후드득 지나가는 빗방울 몇 개만 있어도 순식간에 그대 곁으로 달려간다, 달려간다 아주 짧은, 단 한 번의 부딪침만으로도 너른바위를 덮고 계곡을 덮고 고인돌까지 덮을 만큼 지독하게 간절한 무엇이 있어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2020. 9. 15.
달의 궤적 달의 궤적 / 김경성 지붕을 뚫고 뛰어든 달 조각 뒹구는 선사시대 움집이 있었던 자리에 집 한 채 지었다 그리운 마음 새지 않게 지붕의 숨구멍 촘촘하다 제 몸을 굴리거나 부딪쳐서 한꺼번에 피었다가 숭어리째 지고 마는 파도처럼 가슴 안쪽 통증이 인다 풀꽃 피어 있는 탑의 하대석 틈새, 달에 눌린 자국 깊다 오래된 탑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은 탑의 가장 높은 찰주 끝에 달빛이 걸렸거나 우리가 읽을 수 없는 시간의 그림자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도 나처럼 달을 품고 산다, 달의 모서리에 다친 적 있다 무언가 내려앉았던 자리는 언제나 깊다 움집에 묻어두었던 빗살무늬토기 밥물 넘쳐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길은 이미 지워졌다 모서리 진 달 조각 깎아내며 달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2020.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