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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

깊고 두꺼운 고요

by 丹野 2020. 9. 15.

 

 

깊고 두꺼운 고요

 

김경성

 

 

고요의 깊이가 너무 두꺼워서

오래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의 숨결 같은 바람 하느작거리며

감또개 몇 개 발밑에 떨어뜨려 놓고 새들의 목젖을 만지작거리는지

놀란 목어 흠칫 거린다

저만치의 거리에 앉아있는 사람,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리는 저, 오래된 나무의

부드러운 몸짓

그림 속에서도 흔들거린다

그는 나무를 그리고 나는 마음의 붓으로 먹빛 문장을 그렸다

낯선 그와 나 사이의 행간을 뛰어넘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바람마저 맥을 놓았다

한 그루의 나무가 화선지 속으로 온전히 들어갔을 때쯤

내 마음속의 나무도 뿌리를 깊게 내렸다

깊고 두꺼운 고요 쪼개어서

잘 익은 부도탑 몸빛 덧칠하며 날아가는 나비 그림자, 그대인 듯

가슴으로 받아냈다

서어나무 곁을 지나고 늙은 굴참나무를 지나서

일주문을 빠져나오던 나의 몸이 마치 허물을 벗는 것처럼

뭉클하니 맑아졌다

 

 

 

- 시집 『와온』문학의 전당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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