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잠 / 김경성
문이 닫히는 바람의 저녁이 오기 전, 휘어진 회화나무와 마가목을 지나서 산사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속을 비운 채 껍데기의 몸으로 백 년도 넘게 사는 귀룽나무 두 그루를 만날 수 있다 하나인 듯 밑동이 붙었지만 서로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햇빛 퍼지는 쪽으로 가지 내려놓고 있다
몸 휘어지도록 숨구멍이 있는 곳마다 흰 꽃 실었던 그들은 다른 나무보다 일찍 잎을 틔우고 너무 많은 꽃을 피운 탓에 허기져서 일찍 잎 내려놓는다고 한다 두 그루의 나무가 제 속엣것 모두 퍼내서 수많은 꽃망울 잉태하고 몸 밖으로 검은 열매 가득히 쏟아냈으니, 한철 휘어질 듯 꽃송이로 온몸을 덮는 꽃피는 일이 생의 기쁨이었으니, 속이 텅 빈 등뼈만으로도 속 뿌리 엉긴 채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인 듯 살아가고 있음이랴
해질 무렵 궁궐의 문이 닫히고 담장을 넘어들어온 달빛, 비어 있는 그들의 가슴으로 들어가는 밤이면 달빛 흘러내리지 않게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꽃잠 든다, 달이 뜨는 밤이면 귀룽나무가 보이는 궁궐의 담장 안을 함부로 들여다봐서는 안된다
문이 열리는 아침, 부스스 몸을 터는 귀룽나무 쪼개어지려는지 그늘의 자리가 짙다
- 시집 ' 와온'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