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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1716

거푸집의 국적 외 2편 / 황정산 거푸집의 국적 황정산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코드 블랙 (외 2편) 황정산 떼로 오는 것들은 아름답다 별들이어도 박쥐여도 어지럽히고 냄새나는 것들이어도 몰려.. 2024. 11. 8.
응급실 가는 길 / 김행숙 응급실 가는 길 김행숙 올여름은 모든 게 다 체온과 비슷하게 35도, 36도, 37도쯤에 매달려 있어. 삐죽삐죽한 초록, 초록, 초록의 잎들도 38도쯤. 상갈파출소 사거리의 신호등도 39도쯤. 붉은 신호등처럼 피에 젖은 단 한 사람의 눈동자도 39.5도쯤. 축 늘어진 아이 를 업고 세상은 응급실에서…… 응급실로 뺑뺑이를 돌고 있어. 만져지는 것들이 다 피 같고 피떡 같고…… 제기랄, 나는 내가 더러운 누비옷 같은데 벗겨지지 않아 질질 끌리네. 또 한숨도 못 잤어. 잠을 못 잔 사람들이 40도의 잠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아. 거리에서 너를 사랑했던 이유로 너를 미워하고…… 여름을 좋아했던 이유로 다 함께 정오의 여름을 증오하며 그늘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물끄러미 자기 그림자를 응시하는 순간이 있.. 2024. 11. 8.
아주 오래전부터 외 1건 / 이병률 아주 오래전부터 (외 1편) 이병률 ​ 집을 짓는 데 바람만을 이용했을 것이다​ 거미가 지은 집이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허공과 허공 사이​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멀고도 멀며 가늘고도 아주 길다​ 거미의 권태에 비하면 가미가 가진 독의 양은 놀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몸뚱이의 앞과 뒤를 관통하던 빛 덕분에 몸 안쪽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던 거미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게 거미줄에다 덜렁 나를 걸쳐놓고 돌아온 것인데 나는 그네를 타고 있을까 잘 마르고 있을까​ 거미줄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허공과 허공 사이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있는 거미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2024. 11. 8.
돌의자 / 박수현 돌의자 박수현 독일 슈튜트가르트 펠바하 포도원 이랑 사이 유난히 키 높은 돌의자가 보였다 푸른 이끼가 버짐처럼 번져있는 돌의자, 옛날 일꾼들이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따낸 포도송이 등짐 진 채 잠시 기대어 숨 고르던 곳이라 했다 돌의자는 몇백 년 저렇게 껑충 서서 초록에서 보라로 가는 포도밭의 서사를 고요히 필사하였을 것이다 송이마다 수백 개의 표정을 달고 와르르, 초록의 질문들을 쏟아내는 어떤 보라에게는 물끄러미 눈만 껌뻑거렸을 것이다 쨍한 여름 뙤약볕이 오크통마다 촘촘하게 쟁여지는 동안 눈꺼풀 부비는 포도 송아리들 밤마다 더 달콤한 통점들을 더듬거렸을 것이다 포도밭에 내려앉던 까마귀 떼는 휘도록 달린 어둠을 부리로 물고 지붕이 붉은 고성(古城) 너머 날아갔다 무르익은 보라에서 제비꽃향이 일렁이는 것은 마.. 2024. 11. 8.
작가의 낭송 - 유목의 시간 / 김경성 https://youtu.be/ZeYOtTx4eiI?si=66RsU8WmIYQkRZIB #작가의 시낭송 #유목의 시간 #김경성 시인 #게르 #고비사막 #유목 2024. 10. 21.
작가의 낭송 -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 / 나호열 https://youtu.be/osH1RftZfK0?si=vZQJOaVFWjYlR5Ke #작가의 시낭송 #나호열 시인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 2024. 10. 21.
작가의 낭송 - 동백꽃 졌다고 슬프다니요 / 최경선 https://youtu.be/GW89cWWKKpE?si=lu2vsFUInYq7smkl#작가의 시낭송 #최경선 시인 #동백꽃 졌다고 슬프다니요 #동백꽃 #거문도 시편 2024. 10. 21.
작가의 낭송 - 떨어지는 빗방울로 / 국수연 https://youtu.be/OtZYYbQQnTk?si=vPKnRtgPwFc25fSf #국수연 시인 #작가의시낭송 #떨어지는 빗방울로 #빗방울 2024. 10. 21.
호랑무늬딱총새우* / 김승필 호랑무늬딱총새우* 김 승 필 그 집에서는 병뚜껑 따는 소리가 들렸지 보증금도 없이 월세도 없이 아흔아홉 번 꼬리를 흔들어 집 밖 위험 신호를 알리지만 발이 푹푹 빠졌지 병정개미처럼 큰 집게발로 지난여름 물난리에 끊긴 다리를 보수 중인데 다시 무너지는 패각 난 집 지을게, 넌 망을 봐 골목길 지나 이 적요한 은신처 앞에 탕, 탕, 총소리를 내며 긴 더듬이로 타설 중인 집 말라비틀어진 붓 하나 눈에 띄는 저녁 온몸이 기억하는 별서別墅가 내게는 있었지 *제주 서귀포 섶섬 연안에서 발견된 미기록 딱총새우류. (김승필 프로필) 2019년 계간 등단, 시집 황금알 2021, 청소년 고전 , 청소년 문학 에 참여. 2021년 광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출처: 계간《열린시학》Vol.112 2024년 가을호「이 계.. 2024. 10. 15.
데트라포드 / 이정연 테트라포드 이정원 어떤 격정이 길길이 파랑을 몰고 왔나 누군가에게 가닿아야 할 슬픔이 여기 와서 부딪혀 위로가 될 때 흰 거품을 물고 소스라치던 불량기 많은 바람은 너울성 울음으로 낮춘다 당신은 그 해변에 엎드린 테트라포드 모호한 시구처럼, 난해한 눈빛처럼 묵묵한 일탈의 부름켜로 조각달 같은 목선 한 척을 띄웠는데 난파된 낱말들의 잔해가 일몰의 장엄 속 수묵으로 번지는 것을 보았다 가는 게 세월인지 오는 게 세월인지 흐르는 게 세월인지 수평의 구도로 아득아득 저물다가 습관성 목마름으로 구겨져서 당신 앞에 서면 세월은 물굽이대로 이리저리 휘늘어지면서 이렇듯 발작적으로 부딪는 것이다 이끼 같은 내 마음의 더께를 더 부리지 못하고 철썩철썩 당신의 뺨만 파랗게 치다가 저물어가는 망상의 해변 저쪽으로 낡은 어제를.. 2024.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