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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외 2편) / 김태형

by 丹野 2025. 3. 2.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외 2편)

 

​   김태형

 

 

며칠 전 작은 구름 하나가 지나간 곳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풀을 뜯으러 가고 있습니다

몇 방울 비가 내린 자리에 잠시

초원이 펼쳐지겠지요

이름을 가진 길이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도

이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물어봅니다

이름이 없는 길을

한 번 더 건너다보고서야

언덕을 넘어갑니다

머리 위를 선회하다 멀찌감치 지나가는 솔개를

이곳 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또 물어봅니다

언덕 위에 잠시 앉아 있는 검독수리를

하늘과 바람과 모래를

방금 지나간 한 줄기 빗방울을

끝없이 펼쳐진 부추꽃을

밤새 지평선에서부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별들을

그리고 또 별이 지는 저곳을

여기서는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어봅니다

어떤 말은 발음을 따라 하지 못하고

개울처럼 흘러가는 소리만을 들어도 괜찮지만

이곳에 없는 말을

내가 아는 말 중에 이곳에만 없는 말을

그런 말을 찾고 싶었습니다

먼저 떠나는 게 무엇인지

아름다움에 병든 자를 어떻게 부르는지

그런 말을 잊을 수 있는 곳으로

그런 말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뿌리까지 죄다 뜯어먹어 메마른 구름 하나가

내 뒤를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을 나는 이미 잊었습니다

누군가 당신인 듯 뒤에서 이름을 부른다면

암갈색 눈을 가진 염소가 언덕을 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은귀고리

 

 

 

달이 허물을 벗는 동안 검은 혓바닥이 귀밑에 날름거리는 통에 머릿속이 죄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온몸을 휘어 감고 귀밑까지 기어오른 뱀, 고름투성이 똬리를 튼 비릿한 뱀 한 마리

 

며칠 동안 뱀이 들려주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귀는 자궁 속에 웅크린 태아의 모습과 닮았다지요 어디서 들러붙었는지 몰라도 귀밑을 슬그머니 기어서 그놈은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달이 차오르기를

 

새벽 푸른 공기를 타고 귀밑을 기어나가려던 뱀

 

차라리 이 흉물스런 한 마리 뱀을 바닥 모를 검은 흉곽 속에 가두어 두기로 했습니다

왼쪽 귀밑에 은귀고리를 하나 달았습니다

 

때를 놓친 저놈의 뱀이 바짝 독이 오른 턱을 치켜들고 쉬르르 쉬르르 가슴을 조인 채 타는 제 혓바닥을 날름거릴 때

 

밤새 방랑자들이 두드리는 북소리에 홀려 퉁퉁 부어오른 귀밑에 고름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은빛 귀고리 하나 제 꼬리를 물고 빈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둘까지는 어쨌든 의지대로 이어갈 수 있다

셋을 셌다면 아래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앙다물고 있을 것이다

거꾸로 세지 않는 것은 거꾸로

셀 필요가 없으므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숫자들을 지울 수가 있다

침을 삼키고 넷까지 지나왔다면

다섯이라고 머릿속에 숫자를 세고

애써 여섯을 발음하는 동안

눈이 어두워 멀리 가지 못한 양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양의 무리는 그저 검은색일 뿐이다

절벽에 가파르게 매달려 있는 한 줄기 빛처럼

한 마리씩만 끌어내려서

무사히 계곡을 건너오게 해야 한다

일곱까지 세면서

여덟까지도 쉽게 셀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홉 번째 양은 사라지고 없다

여덟 번째 양을 놓치고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았어도

처음부터 다시 세야 한다

거기까지 세었다면

굳이 아홉까지 셀 이유가 없을 테지만

아홉까지 와서

다시 하나부터 시작하듯이

고작 열 마리뿐인데도

다 세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어쩌다 처음부터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어도

마지막 열 번째 양이 또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머릿수를 세고 네 다리를 세어 보고

꼬리까지 세어 봐야 한다

한 마리 양이 없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

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

 

 

               —시집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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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1971년 서울 출생. 1992 현대시세계 가을호로 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초능력 소년』 『엣세이 최승희』 『국경마을 투루툭이 있음. 현재 청색종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