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중력重⼒ (외 1편)
강영은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지막 남은 눈사람처럼 눈 감고 귀 닫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대에게 닿을 순간을 기다리네.
나 여기 포근한 함박눈 속에 누워 있으니, 그대 함박눈 속을 다녀가시라.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 목적지⽬的地가 어디든 다녀가시라.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 녹아내리는 손바닥 위의 눈송이
나, 함박눈 같은 극지에 도착하네.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이 수목한계선에 꽃으로 피네.
—계간 《상상인》 2025년 봄호
시계의 미래
지나간 것은 지나갔을 뿐이에요.
지나간 줄 모르고
지나간 것에 매달려 있다면
시계가 아니겠죠.
시계는 알아요.
강물이 마침내 하늘로 흐른다는 걸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자꾸 떠나가니까요.
당신이 온다 해도 나는 떠나가겠죠.
그러니 시계겠죠.
한밤중에 시계는 홀로 울겠죠.
사랑과 이별에 내일이 없다고,
끝없이 재생되는 어제 속으로 돌아가겠죠.
당신과 나는 고장 나겠죠.
당신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 해도
멈추지 않고 우는 일,
그것이 시계가 꿈꾸는 일이겠죠
마음의 분침과 초침을 믿어 봐요.
내일의 시계가 내일의 세계가 될지
시계가 걸어가는 그곳이
내일의 세계겠죠.
고장난 시간에 붙잡히지 않는
시계의 미래겠죠.
—계간 《시와 경계》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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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을 졸업.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詩論』 『너머의 새』, 시선집 『눈잣나무에 부치는 詩』, 에세이집 『산수국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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