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외 2편)
김태형
며칠 전 작은 구름 하나가 지나간 곳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풀을 뜯으러 가고 있습니다
몇 방울 비가 내린 자리에 잠시
초원이 펼쳐지겠지요
이름을 가진 길이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도
이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물어봅니다
이름이 없는 길을
한 번 더 건너다보고서야
언덕을 넘어갑니다
머리 위를 선회하다 멀찌감치 지나가는 솔개를
이곳 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또 물어봅니다
언덕 위에 잠시 앉아 있는 검독수리를
하늘과 바람과 모래를
방금 지나간 한 줄기 빗방울을
끝없이 펼쳐진 부추꽃을
밤새 지평선에서부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별들을
그리고 또 별이 지는 저곳을
여기서는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어봅니다
어떤 말은 발음을 따라 하지 못하고
개울처럼 흘러가는 소리만을 들어도 괜찮지만
이곳에 없는 말을
내가 아는 말 중에 이곳에만 없는 말을
그런 말을 찾고 싶었습니다
먼저 떠나는 게 무엇인지
아름다움에 병든 자를 어떻게 부르는지
그런 말을 잊을 수 있는 곳으로
그런 말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뿌리까지 죄다 뜯어먹어 메마른 구름 하나가
내 뒤를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을 나는 이미 잊었습니다
누군가 당신인 듯 뒤에서 이름을 부른다면
암갈색 눈을 가진 염소가 언덕을 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은귀고리
달이 허물을 벗는 동안 검은 혓바닥이 귀밑에 날름거리는 통에 머릿속이 죄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온몸을 휘어 감고 귀밑까지 기어오른 뱀, 고름투성이 똬리를 튼 비릿한 뱀 한 마리
며칠 동안 뱀이 들려주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귀는 자궁 속에 웅크린 태아의 모습과 닮았다지요 어디서 들러붙었는지 몰라도 귀밑을 슬그머니 기어서 그놈은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달이 차오르기를
새벽 푸른 공기를 타고 귀밑을 기어나가려던 뱀
차라리 이 흉물스런 한 마리 뱀을 바닥 모를 검은 흉곽 속에 가두어 두기로 했습니다
왼쪽 귀밑에 은귀고리를 하나 달았습니다
때를 놓친 저놈의 뱀이 바짝 독이 오른 턱을 치켜들고 쉬르르 쉬르르 가슴을 조인 채 타는 제 혓바닥을 날름거릴 때
밤새 방랑자들이 두드리는 북소리에 홀려 퉁퉁 부어오른 귀밑에 고름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은빛 귀고리 하나 제 꼬리를 물고 빈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둘까지는 어쨌든 의지대로 이어갈 수 있다
셋을 셌다면 아래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앙다물고 있을 것이다
거꾸로 세지 않는 것은 거꾸로
셀 필요가 없으므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숫자들을 지울 수가 있다
침을 삼키고 넷까지 지나왔다면
다섯이라고 머릿속에 숫자를 세고
애써 여섯을 발음하는 동안
눈이 어두워 멀리 가지 못한 양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양의 무리는 그저 검은색일 뿐이다
절벽에 가파르게 매달려 있는 한 줄기 빛처럼
한 마리씩만 끌어내려서
무사히 계곡을 건너오게 해야 한다
일곱까지 세면서
여덟까지도 쉽게 셀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홉 번째 양은 사라지고 없다
여덟 번째 양을 놓치고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았어도
처음부터 다시 세야 한다
거기까지 세었다면
굳이 아홉까지 셀 이유가 없을 테지만
아홉까지 와서
다시 하나부터 시작하듯이
고작 열 마리뿐인데도
다 세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어쩌다 처음부터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어도
마지막 열 번째 양이 또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머릿수를 세고 네 다리를 세어 보고
꼬리까지 세어 봐야 한다
한 마리 양이 없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
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
—시집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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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1971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로 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초능력 소년』 『엣세이 최승희』 『국경마을 투루툭』이 있음. 현재 『청색종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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