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령의 생에서 왔다_멀티버스
박지웅
어느 날이라는 새가 있다
잎사귀만한 새 안에 내가 잠들어 있다
생전에 내 모든 날은 평범했다
어느 날과 일요일을 지내거나 낮달로 날려 보내거나
돌무덤에 어느 날을 묻어준 것도
그럴 만하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들
아무 일 없는 오래전 어느 날을 무덤으로 쓰는,
나는 참 이상한 꿈
어느 날을 새장에 가두고 어느 날로부터 달아나려는 신을 만났다, 샛강은 없는데 물소리를 건너가는 다리가 희미해져 더 내딛지 못하고
허우적허우적 위독한 밤을 넘기고
그처럼 환한 대낮은 처음 보았다
신은 어느 날을 얌전하고 평범한 흰 깃털의 새라고 소개했지만
가만히 보니 어느 날은 뒷모습만 남은 새, 아주 얇은 새라서 종이배로 접어 냇가에 띄우면 훨훨 흘러가는 새
신은 혼잣말을 한다, 어느 날은 숨죽이다 끝내 맑아져 눈가에서 굴러 떨어지는 새
약간 슬퍼요, 놓친 길과 숨겨진 길에 살거든요
평범한 날은 낙원이 되거나 어느 날이 되는 거예요
잎사귀만한 새
가령, 당신의 귓속말에 고백을 키우던 새
뒤뜰과 초승달과 봄을 덮을 만큼
거대해진 어느 날은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있다, 이곳과 먼 곳에
처음과 도처에 어느 날이라는 새가 있다
어느 날이라는 생이 있다
—계간 《가히》 202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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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부산 출생. 2004년 《시와사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나비가면』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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