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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파란 우체통 (외 1편) / 윤옥주

by 丹野 2025. 3. 8.


파란 우체통 (외 1편)

  윤옥주



양고기가 구덕구덕 말라 가는 헛간을 지나면

진한 안개를 밟고 미끄러진 적 있는 우체통이 있다

더듬더듬 써 내려가던 그 시절의 편지는 우슬이 되어

희미하고 먼 어느 창문에 가 붙어 있다

눈가에서 말라 가는 잠자리 날개

잡을 수 없는 세계를 이어 주던 길목을 기웃거리고

안개를 딛고 서 있는 낭떠러지 앞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딘다

청동거울의 뒷면으로 저녁이 온다

구부러진 길에 도화지의 파란 물감이 굳어 있다

나는 어디쯤 수신되고 있는가

지평선은 소실점을 향해 길어지고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예배당의 종소리

홀로 창가를 서성이는 편지들이

잠자리의 날개를 지나 내게 도착한다

  

눈사람과 염소



눈사람이 염소 곁에 배경 화면처럼 서 있다

눈사람은 눈이 부실 때마다 염소 뒤로 숨는다

갈증이 날 때 염소는 눈사람을 조금씩 뜯어 먹는다

염소가 눈사람의 심장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릴 때

그렇다고 눈사람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눈사람은 염소의 입안에 휘파람처럼 고여 있다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조금씩 사라져 간다



             —시집 『눈사람과 염소』 2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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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옥주 / 정읍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한국수필》 등단. 2012년 《발견》으로 시 등단. 시집 『젖은 맨발이 있는 밤』 『눈사람과 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