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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1755

묵나물처럼 / 박일만 묵나물처럼 박일만 그렇지요나물을 삶아 도시에서처럼그냥 볕에만 말리면풋내 가득하고 제맛이 안 나지요산다는 것처럼요 그렇지요나물을 삶아 시골 마당에 널어놓고아침저녁으로 이슬을 맞혀가며두 손으로 비벼 줘야 제맛이 나지요산다는 것처럼요 사람의 인생도이슬에 젖듯이나물끼리 비비듯이풍파를 겪으면서 익어가야만깊은 맛이 절로 우러나지요산다는 것처럼요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크고 작은 시련들을 피하지 않고잘 극복한 사람에게서잘 말린 나물처럼 깊은 맛이 나지요 암 그렇지요상처가 있는 사람이 더 진국이지요산다는 것처럼요 ―반년간 《시인하우스》 2024 하반기-------------------박일만 / 1959년 전북 장수 출생. 2005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2025. 1. 13.
단단한 지붕 외 2편 / 정영주 단단한 지붕 (외 2편) 정영주 자궁엔 지진이 없단다, 아가야다시 자궁으로 들어가거라아직 너는 물이니 몸 한껏 구부리면다시 양수로 흘러갈 거야눈도 귀도 아직 열지 말거라, 아가야탯줄로 받아먹던 노래와몸 밖에서 그려 주던 숲과 언덕과 강물의 춤들은이렇게 잔인하게 무너질 수 있단다아가야, 나는 네 언덕이란다네 숲이고 햇빛 좋은 네 마당이란다젖이 마르지 않는 동산이란다아가야, 아직은 눈 뜨지 말거라, 놀라지도 말거라어미가 둥글게 몸 구부려 단단한 지붕을 만들 동안내 뼈가 산을 받아내고 콘크리트 절벽을 밀어낼 동안너는 자궁에서 부르던 옹알이, 탯줄에 걸고발길질하고 놀거라어미 뼈가 우두둑 우두둑 부러지고 산산조각이 나도네 동산은 들꽃과 나비들이 만발할 터이니아가야, 천둥 번개 땅이 갈라지고어미 호흡이 지.. 2025. 1. 11.
고비의 당신 / 김선우 고비의 당신 김선우 당신 꿈을 꾸었어요 지상에서 유일하게야생 낙타와 야생 당나귀가 사는 곳모래바람 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길을 잃지 않는,보이는 것으로 지도를 삼지 않는 사람들 샘에 이르자양과 말과 낙타가 먼저 물을 먹도록뒷전에서 기다리며 조용히 웃는 당신의 눈빛,가축으로 길들였으나 가축만은 아닌서로 보살피는 쪽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품위를당신은 가계로부터 물려받았더군요아름다웠습니다 함께 비를 맞던 순간을 오래 기억할게요순식간 훑고 지나갈 뿐이지만한 방울 한 방울 들꽃이 되는 비물 귀한 곳에서 극진으로 생생해지는물의 환희가피톨처럼 온몸으로 전해졌지요 때로 당신 꿈을 꾸고 기도합니다메마른 도시 너무도 메마른 날에 고비의 당신이 오래도록 안녕하기를당신의 안녕으로 어떤 아름다움이지상에서 끝내 지켜지기.. 2025. 1. 5.
바람불고 고요한 / 김명리 바람 불고 고요한 김명리(1959~) 죽은 줄 알고 베어내려던마당의 모과나무에어느 날인가부터 연둣빛 어른거린다얼마나 먼 곳에서 걸어왔는지잎새들 초록으로 건너가는 동안꽃 한 송이 내보이지 않는다 모과나무 아래 서 있을 때면아픈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적막이 또 한 채 늘었어요 이대로 죽음이삶을 배웅 나와도 좋겠구나 싶은 바람 불고 고요한 봄 마당 2025. 1. 4.
완연히 붉다 / 김명리 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활시위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김명리 /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 2025. 1. 4.
검은염소의 저녁 / 김명리 검은 염소의 저녁​김명리​​어른어른한 물그림자 같은땅 속의 거미들이고요의 한가운데까지 몰려오는 이런 저녁엔​잘못 들어선 봄의 모퉁이 같은중국식당에서혼자 짜장면을 먹는다​채마밭이 한눈에 들어오는거름냄새 풍기는 국도변의 중국집엔손님이라고는 나 혼자뿐​어딘지 모르게낡은 예배당 기우뚱한 첨탑 같은 벼랑끝에서그토록 오래 서성이면서결코 뛰어내리지는 않는​한 마리 검은 염소의길다란 동공 같기만 한​검은 국수를 먹는다​꽃도 아직이고 잎도 아직인 봄날 저녁에​​ㅡ계간 《시인시대》(2024, 겨울호)-------------김명리 / 198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물보다 낮은 집』『적멸의 즐거움』『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제비꽃 꽃잎 속』『바람 불고 고요한』. 산문집 『단풍객잔』이 있음. 2025. 1. 4.
물방울 / 이산하 물방울 이산하 아기 때 할머니가 달걀을 앞에 놓고나한테 잡아 보라고 했다.나는 방바닥을 겨우 겨우 기어가며움켜잡아 보려고 애썼지만손끝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밀려나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았다. 모슬포에서 알뜨르비행장을 지나고 송악산을 거쳐도어느 곳이든 다른 비가 오고 다른 바람이 불었다.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착하면 더욱 좋은 곳넓은 정원의 배롱나무 그늘 아래고요히 잠든 나무 주인의 이름이 작은 돌에 새겨진제주도 서귀포 저지문화예술인 마을의 김창열미술관 거기 난공불락의 물방울이 있었다.어릴 때 끝내 잡히지 않았던거기 난공불락의 달걀이 있었다.나는 달걀 하나를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달걀 너머의 그 어떤 세계를 취하려고 한 것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고 깊이 잠들면 배롱꽃이 되어 .. 2024. 12. 31.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 김이듬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질녘 남쪽 해변에 도착했다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여기 많다고동이 맞는 말이야? 지금이 간조야? 만조야? 너는 뛰어다니며 큰소리로내게 묻는 건지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헷갈리잖아 어두워가는 갯벌 위엔 길지 않은 금이 많다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흔적인지자취인지생존 발각될 단서인지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고둥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부득이 나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 2024. 12. 28.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 김형로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김형로 아버지 그곳에도 뭇국이 있나요 먼 부엉이 울음 같이 눈은 오고하얀 숨으로 밤은 지워지고귀 세우면 눈 쌓이는 소리 사락사락 봄 춘 자 들어간 그 도시 기억나네요어린 우리는 눈굴로 숨어들고눈은 깔깔 웃음을 삼키고우린 늦은 밤 뭇국을 먹었죠 나 어쩌다 세상에 나와져서아버지를 만나눈 뭉치듯 살과 뼈 붙이고이제 먼 나라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눈 오는 밤 여물지 못해서 어디 쓰겠냐하얀 공책 뒤 적어놓은 그 아들,그럭저럭 뭇국 정도는 되었으니 눈 오는 밤창을 열면 아름드리 팽나무 위로사분사분 세상 커지는 소리눈굴 닫히는 소리 아득한—뭇국 같이 먹고 싶네요세상은 박꽃처럼 밝아오고아버지와 나는 기억으로 환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뭇국 앞에사각사각 달그락달그락아버지와 나는 그때처럼 .. 2024. 12. 28.
회색 코트 / 강기원 회색 코트 강기원 이른 아침회색 코트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날로 헐거워진다몸이 줄어드는 걸까할 일은 점점 늘어나는데 헐렁한 코트를 입고 지하철 속에몸뚱이를 간신히 밀어 넣는다날로 사람들이 많아진다인구가 줄어 큰일이라는데 사무실에 도착해바퀴 달린 검은 의자에 털썩의자는 날로 움푹 패인다체중은 줄어드는데 바퀴가 달렸으나 달리지 않는의자점점 웅덩이가 되어간다, 언젠가의자 속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가 뜰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회색 코트 한 벌이퇴근 시간의 지옥철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코트 속에 있어야 할 몸이 없다 아뿔사!코트는 몸뚱이를 잊고, 잃고혼자서 실려간다 통조림 속 정어리처럼 꽉꽉 들어찬사람들 사이에서발도 없이 붕 뜬 채 ―계간 《시인시대》 2024 겨울---------.. 2024.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