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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 김이듬

by 丹野 2024. 12. 28.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질녘 남쪽 해변에 도착했다
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
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
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
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
여기 많다
고동이 맞는 말이야?

지금이 간조야? 만조야?

너는 뛰어다니며 큰소리로
내게 묻는 건지
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
헷갈리잖아

어두워가는 갯벌 위엔 길지 않은 금이 많다
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
흔적인지
자취인지
생존 발각될 단서인지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
고둥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부득이 나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
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지겠지

빈 비닐봉지가 후덥지근한 바람을 싣고
온몸으로 날아오른다


             ―계간 《시와 반시》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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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1969년 부산 출생. 2001년 《포에지》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 『영원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딜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