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페이지
김건영
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한데 섞을 것을 부러 따로
무치고 볶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먹고 사느라
모든 시와 노래가 나를 지나쳐 흘러가네
책은 먹을 수 없는데
쌓이고 있다
펼쳐 놓은 페이지는 쉬어가고 있다
나물 볶는 냄새는 거실을 넘어서
책 사이로 흘러든다
기의를 기울이면
쉬어가는 페이지
읽지도 않고 쌓아 놓은 책들도 쉬어가고 있다
말이 쉬어갈 때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도 쉬어가고 있다
말을 다루는 사람들이 섞이고 있다
쉬어가는 말이 쌓이고
한데 섞일 말들이 낱낱이
쉬어가고
—계간 《문학들》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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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미디어창작학부 졸업. 201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파이』 『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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