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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쉬어가는 페이지 / 김건영

by 丹野 2024. 12. 28.


쉬어가는 페이지

    김건영



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한데 섞을 것을 부러 따로
무치고 볶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먹고 사느라
모든 시와 노래가 나를 지나쳐 흘러가네

책은 먹을 수 없는데
쌓이고 있다

펼쳐 놓은 페이지는 쉬어가고 있다

나물 볶는 냄새는 거실을 넘어서
책 사이로 흘러든다

기의를 기울이면
쉬어가는 페이지

읽지도 않고 쌓아 놓은 책들도 쉬어가고 있다
말이 쉬어갈 때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도 쉬어가고 있다
말을 다루는 사람들이 섞이고 있다
쉬어가는 말이 쌓이고
한데 섞일 말들이 낱낱이
쉬어가고


              —계간 《문학들》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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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미디어창작학부 졸업. 201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파이』 『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