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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늙은 말 / 김 윤

by 丹野 2024. 12. 17.


늙은 말

  김 윤



말은 이미 늙었고

진흙탕 속에 서서 비를 맞았다
젖은 속눈섶을 떨고 있었다

동네 끝에 말집이 있었다
우리는 마구간 앞에 서서 말을 쳐다보는 일이 많았다

종일 수레에 장작을 실어 날랐다
길에 멈추어 서면 채찍으로 맞았다

말은 서서 잔다
자는 말에게 남자애들이 돌을 던졌다

나는 눈을 가리고 울었다

그 옛날 늙은 암말이 내 속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말은 무릎이 아프구나
아직도 비를 맞고 있구나

나는 다 잊어버렸다
늙은 말은 지름길을 알아서

말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



         ―계간 《시와 함께》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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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 /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지붕 위를 걷다』 『전혀 다른 아침』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