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외 2편)
고 영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꽂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가출
아주 평화롭게
식탁 위에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접시 속에 살던 새 한 마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접시 속에서 혼자 살던 새마저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집을 나간 것이라고
도리어
미안해했다
쓸어내린다는 말
한 사람을 쓸어내린 적 있다
아비가 어미를 쓸어내리듯
기러기가 하늘을 쓸어내리듯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쓸어내리듯
빗자루가 지구를 쓸어내리듯
눈물이 눈물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려야 할 것이
쓸어내려야 할 것들을 쓸어내리고 있다
연못이 파문을 쓸어내리듯
바다가 파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듯
거짓이 거짓을 쓸어내리듯
밥알이 배고픔을 쓸어내리듯
기쁨이 슬픔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려서 오히려 더 쓰라린 사람도 있다
―시집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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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 1966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200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감성 시 에세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현재 계간 《가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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