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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 김형로

by 丹野 2024. 12. 28.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김형로


아버지 그곳에도 뭇국이 있나요

먼 부엉이 울음 같이 눈은 오고
하얀 숨으로 밤은 지워지고
귀 세우면 눈 쌓이는 소리 사락사락

봄 춘 자 들어간 그 도시 기억나네요
어린 우리는 눈굴로 숨어들고
눈은 깔깔 웃음을 삼키고
우린 늦은 밤 뭇국을 먹었죠

나 어쩌다 세상에 나와져서
아버지를 만나
눈 뭉치듯 살과 뼈 붙이고
이제 먼 나라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눈 오는 밤

여물지 못해서 어디 쓰겠냐
하얀 공책 뒤 적어놓은 그 아들,
그럭저럭 뭇국 정도는 되었으니

눈 오는 밤
창을 열면 아름드리 팽나무 위로
사분사분 세상 커지는 소리
눈굴 닫히는 소리

아득한—
뭇국 같이 먹고 싶네요
세상은 박꽃처럼 밝아오고
아버지와 나는 기억으로 환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뭇국 앞에
사각사각 달그락달그락
아버지와 나는 그때처럼 또
말이 없이


          ―계간 《시인시대》 202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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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로 / 경남 창원 출생.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미륵을 묻다』 『숨비기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