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이산하
아기 때 할머니가 달걀을 앞에 놓고
나한테 잡아 보라고 했다.
나는 방바닥을 겨우 겨우 기어가며
움켜잡아 보려고 애썼지만
손끝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밀려나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았다.
모슬포에서 알뜨르비행장을 지나고 송악산을 거쳐도
어느 곳이든 다른 비가 오고 다른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착하면 더욱 좋은 곳
넓은 정원의 배롱나무 그늘 아래
고요히 잠든 나무 주인의 이름이 작은 돌에 새겨진
제주도 서귀포 저지문화예술인 마을의 김창열미술관
거기 난공불락의 물방울이 있었다.
어릴 때 끝내 잡히지 않았던
거기 난공불락의 달걀이 있었다.
나는 달걀 하나를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
달걀 너머의 그 어떤 세계를 취하려고 한 것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고 깊이 잠들면 배롱꽃이 되어 깨어난다.
나는 끝내 저 삼엄한 물방울의 옥쇄를 뚫지 못하리라.
—계간 《청색종이》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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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 1960년 경북 영일 출생. 본명 이상백.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에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동인으로 참여. 시집 『한라산』 『악의 평범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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