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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완연히 붉다 / 김명리

by 丹野 2025. 1. 4.


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
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
활시위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
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
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
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
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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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바람 불고 고요한』. 산문집 『단풍객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