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지붕 (외 2편)
정영주
자궁엔 지진이 없단다, 아가야
다시 자궁으로 들어가거라
아직 너는 물이니 몸 한껏 구부리면
다시 양수로 흘러갈 거야
눈도 귀도 아직 열지 말거라, 아가야
탯줄로 받아먹던 노래와
몸 밖에서 그려 주던 숲과 언덕과 강물의 춤들은
이렇게 잔인하게 무너질 수 있단다
아가야, 나는 네 언덕이란다
네 숲이고 햇빛 좋은 네 마당이란다
젖이 마르지 않는 동산이란다
아가야, 아직은 눈 뜨지 말거라, 놀라지도 말거라
어미가 둥글게 몸 구부려 단단한 지붕을 만들 동안
내 뼈가 산을 받아내고 콘크리트 절벽을 밀어낼 동안
너는 자궁에서 부르던 옹알이, 탯줄에 걸고
발길질하고 놀거라
어미 뼈가 우두둑 우두둑 부러지고 산산조각이 나도
네 동산은 들꽃과 나비들이 만발할 터이니
아가야, 천둥 번개 땅이 갈라지고
어미 호흡이 지천을 흔들다 끊어져도
네 어여쁜 숨소리 작은 목숨 끝내 지키는
장한 모습 보여다오
아가야, 아직 이름도 없는 내 아가야
어미의 부서진 몸뚱이 든든한 철벽이 되마
내 사랑, 아 아 내 아가야
* 쓰촨성 지진 때 온몸의 뼈가 부서지면서도 품에 안은 갓난아이를 살린 어머니의 죽음 앞에 머리를 숙인다.
누가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허옇게 뒤집어쓴 눈으로
강가에 홀로 앉아있는 나무 의자
누가 쓸쓸한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차고 냉랭한 의자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안식이었을 터,
마치 혹한을 견디는 것이 사유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직은 성성한 네 다리가 의연하다
의자의 전언이 강을 건너 내게로 온다
몇 번이고 나는 그 의자에게로 걸어가고 싶었다
식은 햇빛 한 장 걸친 의자의 눈을 털고
오랫동안 시 한 수 적지 못한 냉기의 몸을
부려놓고 싶었다
핸드폰을 열고 먼저 그를 담는다
고독한 사유 한 컷!
제 몸에 눈을 받아 앉혀놓고 강물을 베끼는
의자의 시위 곁으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겨울 배롱나무
제 살가죽을 제가 벗긴다
몸을 비틀고 용을 쓸 때마다
잎 하나 남지 않는 벌건 선혈의 몸피
제 맨살 어깨에 축축 걸쳐 놓는다
각이 떠진 가죽들이
서서히 뒤틀려 허공에서 육탈이 될 때까지
속죄의 겨울을 나기 위한 장엄한 제사를 드리는 나무
아궁이 속 장작의 열기처럼
배롱나무 가지가지 구들장마다 후끈 달아오른다
허공의 방들이 덥혀지고
거기 서늘한 내 속피마저 각이 떠진다
번제소 불가마에 낱낱이 타오르는 죄의 면류관들
이 시대의 붉은 방, 한여름 화려한 꽃잎이었다가
생의 겨울이 오면 다 벗어버려야 하는
제 비수로 다시 몸을 달구는
배롱나무의 몸피처럼
그 껍질을 어디에 널어놓고 말릴 수 있을까
한여름 백일 동안 장자의 나비로 날아올랐던
그 몽유의 죄를
내 안의 구들엔 온기조차 없어
배롱나무 그 붉은 숯불처럼
저 혼자 타는 그 온기마저 빌려올 수 있다면
—시집 『달에서 모일까요』 2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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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 1952년 서울 출생. 춘천과 묵호에서 성장.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1999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어달리의 새벽」 당선. 시집 『아버지의 도시』 『말향고래』 『달에서 지구를 보듯』 『바당봉봉』 『통로는 내일모레야』 『달에서 모일까요』. 단국대, 강원대, 조선대, 광주대, 초당대 등에서 인문학과 시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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