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60 물컹한 슬픔 1 물컹한 슬픔 1 김경성 청보라 물감 터트려 히말라야시다 나무 허물어뜨리는 나팔꽃 잠시 쉬는 사이 한여름 햇빛에 찔려 떨어진 제라늄 꽃잎 부스스 눈 비벼대며 마지막 빛을 발한다 어느 곳에서도 꽃이 피어있는 자리는 늘 빛이 나지만 목젖까지 차오르는 습습한 마음 묻어둘 곳 없어 내 .. 2010. 10. 21. 상처 상처 김경성 일생동안 네가 한 일은 나의 긴 목을 휘감고 있던 검은 베일 하늘에 내걸고 빛을 차단하여 눈을 감아도 잘 보이는 세상을 만드는 일 황금빛 조각이 들어있는 몸으로 어둔 하늘 박음질을 해댔다 수없이 반짝이는 못 자국들로 나도 아팠다 초승달의 모서리에 찔려 다친 가슴 밤.. 2010. 10. 21. 붉은 것들은 슬픔이 깊다 프라하 붉은 것들은 슬픔이 깊다 / 김경성 해 질 녘 흥국사 일주문 너머 보이는 길이 깊다 껍질을 벗겨 내지 않은 노을 대숲에 내려앉아 휘어지는 바람의 소리 대웅전 처마, 하늘 끝으로 끌어올리고 까치마저 물이 들었는지 오동나무에서는 붉은 울음 떨어진다 풍경을 흔드는 저, 바람 대.. 2010. 10. 21. 사북역 근처 사북역 근처 / p r a h a 사북역 근처 김경성 바다는 저 멀리 있는데 물고기 모양 구름 지느러미 흔들어 휘청거리는 하늘 그 틈, 빈집이 빈집에 기대어 마당 가득 풀꽃으로 채워놓고 뚱딴지 밭이 되어버린 텃밭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다 우물이 있었던 자리에서 텃밭까지 그만큼의 거리에 따.. 2010. 10. 21. 붉은 달에 관한 기억 붉은 달에 관한 기억 김경성 방파제 너머 포장마차 연탄불 화덕 위에 석쇠 달구어져 벌겋다 반쯤 타다 만 달덩어리 아직 식지 않았는지 불그레한 얼굴 가리지 못하고 흐린 구름 끌어다 놓았다 달그림자 진 밤하늘 듬성듬성 떠 있는 별 위로라도 하는 듯 오징어잡이 배 집어등 불빛 바닷물.. 2010. 10. 21. 물의 유전자 물의 유전자 / 김경성 우물천장이 있는 집, 물결무늬 선명한 우물마루가 있다 옹이가 있는 자리마다 바람이 휘돌아나가고 흔들림이 없는 자리에는 그대 마음의 파문이 인다 깃털 달린 씨앗이었을 때부터 우물을 꿈꾸던 나무, 솔방울 굴리며 송홧가루 날리며 제 속에서 출렁거리는 물길을.. 2010. 10. 21. 거리 재기 거리 재기 / 김경성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 어떤 새가 흘려놓고 간 검은 깃털 물갈퀴처럼 바람을 저으며 젖무덤 위에 자리를 틀었네 벗은 몸으로 멀리 날아갔을 새의 행적을 적어놓은 상형문자 몇 개 청동 그릇에 넣어두었네 새들이 되돌아올 길의 지문을 날개 안쪽에 새기는 동안 몸속으.. 2010. 10. 21. 꽃 핀다, 꽃 피어난다 꽃 핀다, 꽃 피어난다 김경성 이미 꽃 진 지 오래된 연밭을 찾아 나섰다 다소곳이 고개 숙인 연잎들 토굴에 들어가서 수행자가 된 연꽃 씨앗, 제 몸 말리며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토굴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몸속 깊은 방, 문 열어놓고 진흙 속으로 떨어지는 뿌리의 긴 시간을 위하여 .. 2010. 10. 21. 물컹한 슬픔 2 물컹한 슬픔 2 -사과나무 김경성 한 사람이 무릎 꿇고 앉아 먹을 갈았다 맑은 물이 먹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제 빛을 잃었을 때 그는 마음속의 심지를 꺼내서 그림을 그렸다 붓끝이 휘어질 때마다 나는 부러질 듯 몸을 구부렸다 화선지 너머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화선지 밖으로 나가는 일.. 2010. 10. 21. 꿈 자경전꽃담장 앞 살구나무 / p r a h a 꿈 / 김경성 자경전 꽃담장 앞 살구나무 수백 개의 살구 떨어졌다 씨앗이 드러나고 모래가 박혀 멍이 든 살구 울컥 눈물나는… 그런 것이다 시속 몇 킬로미터로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잎 돋고 꽃 피어나고 꽃잎 부드럽게 날리며 마음먹었던 것이다 뿌리.. 2010. 5. 15. 이전 1 ···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