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푸집의 국적
황정산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코드 블랙 (외 2편)
황정산
떼로 오는 것들은 아름답다
별들이어도
박쥐여도
어지럽히고 냄새나는 것들이어도
몰려와 철책을 붙잡는 검은 손들마저도
아름답다
그들은 시간을 건너 살아가기에
머물러 울타리를 만들지 않고
그곳과 이곳을 나누지 않으므로
누구도 너라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언제나 그들의 시선에 의해
높은 담장 안의 마른나무와 썩은 풀들은
있음이 증명되고
우리가 우리라는 사실은
그들의 발자국에 따라 항상 의심된다
까맣게 떼 지어 오는 것들은 까만 것이 아니다
호명되지 못한 꽃들
읽히지 않은 편지들
우리가 없는 곳의 우리들이다
긴 여자
그녀는 결코 걷지 않는다
미끄러져 스며들어 어디든지 간다
대나무를 타며 장검을 휘두르는 그녀는
빨랫줄이 되어 걸려 있기도 하고
계단에 그림자로 누워 있기도 한다
그녀는 길이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허리띠나 넥타이를 선물하는 법이 없다
붙잡을 게 없으므로
손톱을 기르거나 치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먼 곳을 보고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안 보는지도 모른다
긴 허리로 나에게 기대
다리보다 긴 손가락으로
내 몸을 헤집어 젖은 지푸라기를 꺼낸다
불씨를 가지고 있지 못한 그녀는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진다
긴 여자가 있다
아니 사라진 여자는 모두 길다
―시집 『거푸집의 국적』 2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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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산 / 1958년 목포 출생.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 시 발표. 저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 시집 『거푸집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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