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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돌의자 / 박수현

by 丹野 2024. 11. 8.

돌의자

   박수현



독일 슈튜트가르트 펠바하 포도원
이랑 사이 유난히 키 높은 돌의자가 보였다
푸른 이끼가 버짐처럼 번져있는 돌의자,
옛날 일꾼들이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따낸
포도송이 등짐 진 채 잠시 기대어 숨 고르던 곳이라 했다
돌의자는 몇백 년 저렇게 껑충 서서
초록에서 보라로 가는 포도밭의 서사를 고요히
필사하였을 것이다
송이마다 수백 개의 표정을 달고
와르르, 초록의 질문들을 쏟아내는 어떤 보라에게는
물끄러미 눈만 껌뻑거렸을 것이다
쨍한 여름 뙤약볕이
오크통마다 촘촘하게 쟁여지는 동안
눈꺼풀 부비는 포도 송아리들
밤마다 더 달콤한 통점들을 더듬거렸을 것이다
포도밭에 내려앉던 까마귀 떼는
휘도록 달린 어둠을 부리로 물고
지붕이 붉은 고성(古城) 너머 날아갔다
무르익은 보라에서 제비꽃향이 일렁이는 것은
마른 잎사귀들 사이로 포도알 닮은 눈망울이 스치는 것은
밤마다 반음 내린 누군가의 노래가
높고 조붓한 돌의자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게다
물살처럼 찰랑이는 별빛들이 돌의자에 내려앉아
적막 한 줌 슬몃 꺼내놓기 때문일 게다



           ―계간 《서정과 현실》 2024년 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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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경북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페인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