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아주 오래전부터 외 1건 / 이병률

by 丹野 2024. 11. 8.


아주 오래전부터 (외 1편)

    이병률


집을 짓는 데 바람만을 이용했을 것이다​

거미가 지은 집이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허공과 허공 사이​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멀고도 멀며 가늘고도 아주 길다​

거미의 권태에 비하면
가미가 가진 독의 양은 놀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몸뚱이의 앞과 뒤를 관통하던 빛 덕분에
몸 안쪽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던 거미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게
거미줄에다 덜렁 나를 걸쳐놓고 돌아온 것인데
나는 그네를 타고 있을까
잘 마르고 있을까​

거미줄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허공과 허공 사이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있는 거미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2024.4
----------------------
이병률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