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외 1편)
이병률
집을 짓는 데 바람만을 이용했을 것이다
거미가 지은 집이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허공과 허공 사이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멀고도 멀며 가늘고도 아주 길다
거미의 권태에 비하면
가미가 가진 독의 양은 놀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몸뚱이의 앞과 뒤를 관통하던 빛 덕분에
몸 안쪽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던 거미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게
거미줄에다 덜렁 나를 걸쳐놓고 돌아온 것인데
나는 그네를 타고 있을까
잘 마르고 있을까
거미줄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허공과 허공 사이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있는 거미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2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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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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