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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 산문 | 내 시에 관한 이야기 셋 / 강인한

by 丹野 2024. 12. 9.


| 산문 | 내 시에 관한 이야기 셋

               강인한


람세스 2세가 파리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상징 의미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2세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는 건 여행의 속성이다. 때로는 새벽같이 나서서 길 떠나는 준비가 성가시기도 하나 기대에 찬 설렘은 괴로움을 상쇄한다. 그런데 기껏 새벽같이 나서서 오랜 시간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이 허접한 관광 상품을 파는 곳이었을 때 여행 전체가 실망스러워지는 게 패키지여행의 단점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유여행을 많이 선호하는 편인데 판에 박은 관광 설명을 해주는 가이드를 만나는 건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오래전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보고 개선문 거리에 서보기도 하고 무슨 공원 광장에 선 오벨리스크를 보기도 하였다. 외국에서 선물로 보내준 오벨리스크였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옛날에도 국가 간의 우정과 선의의 상호 교류가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1997년이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가 번역, 출간되기를 기다리며 한 권 한 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시기가. 시인이며 불문학 교수인 김정란 번역, 전체 5권으로 된 장편소설인데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의 일대기로서 이듬해 번역자인 시인이 백상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구약 성경에 유태인들을 이끌고 모세가 홍해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였다는 이야기의 반대편에 소설 『람세스』가 있다. 3천여 년 전 람세스와 모세가 같은 시대의 인물임을 근거로 프랑스 작가가 상상력을 펼쳐 이집트 쪽에서 파라오 람세스를 그려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소설에 도취한 람세스의 땅 이집트에 내가 실제로 가보게 된 건 2019년 구정 무렵. 중동과 아프리카를 떠돌며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이 이제는 카이로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집트 가족여행이 실현된 것이다.

   카이로의 이집트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곳은 미라 진열실, 그 중에서도 람세스 2세가 유리 진열장에 안치된 곳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그런지 더 많은 눈과 어깨가 비비적거린다. 여기엔 목청 큰 경호원이 상시 감시하며 머리 위에서 우렁차게 “비, 콰, 이, 엇!” 명령어를 스타카토로 내리친다. 미라는 살았을 때보다 훨씬 줄어든 모습이라 했다. 그래도 람세스 미라는 족히 170센티는 되어보였다. 생전에 장대한 체구였으리라. 스물셋에 왕좌에 오르고 예순일곱 해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가장 위대한 파라오의 모습은 한 구의 미라로 까맣게 누워 있다. 통치 기간 동안 정실부인 6명 외에도 여러 명의 후궁, 후처가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1백 명 넘는 자녀가 태어났다고 한다.
   기록에는 전한다. 람세스 2세, 기원전 1303년 출생. 그러므로 지금부터 3322년 전 태어난 인간의 현재 모습이 내 눈앞에 누운 저 미라인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언젠가부터 미라의 보존 상태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다. 방부 처리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곰팡이의 증식이 나타나는 보존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의 고고학과 의학계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람세스 2세를 프랑스로 이송해서 함께 그 문제를 연구해보자고 하였다. 결국 1974년 프랑스까지 가서 람세스 2세는 8개월간 방사선치료를 받고 돌아와 현재까지는 정상적인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집트 나일강 크루즈 여행도 포함된 일정이었다. 맏딸 내외와 우리 내외, 그리고 카이로에서 합류한 아들네 세 식구까지 모두 일곱 명의 크루즈 여행은 한 시간을 비행기로 찾아간 룩소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룩소르는 고대 이집트의 테베라는 곳. 그리스신화에도 나오고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 도시 테베의 2월 기후는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비슷한 게 보통이라는데 이상기후로 그날따라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였다.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만든 이 신전을 들어서면 입구에 양의 머리를 지닌 스핑크스가 한 줄로 도열하고 있다. 그리고 20미터가 넘는 조형물, 깎아놓은 연필처럼 오벨리스크가 우뚝한 입구와 마주친다. 여기서 현지인 가이드 무수타파가 힘주어 말한다. 입구 왼쪽에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른쪽에도 똑같은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고, 그것을 이집트에 총독으로 와 있던 무함마드 알리라는 자가 프랑스 본국 정부에 선물로 바치고 저렇듯 허전하게 좌대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람세스 2세 때 건립된 몇 개의 높다란 오벨리스크와 람세스 자신의 앉아있는 모습의 석상들, 그리고 둥글고 커다란 수십 개의 돌기둥들… 모조품 아닌 진품으로 3천 년 넘는 세월을 꿋꿋이 버텨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백성들에게 평판이 좋은 제왕이었다. 그는 히타이트족과의 전쟁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 전쟁 이후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며 국내 각지에 거대한 자신의 조각상들을 세웠다.
   이집트의 남단 아부심벨에 특별히 자신의 대신전을 알뜰히 조성하고 곁에다가 왕비 네페르타리 소신전도 아담하게 꾸민 것은 웅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다. 강기슭 암벽에 세워진 이 두 개의 신전들은 낫세르 대통령의 아스완하이댐 공사를 당하여 수몰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졌다.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전 세계 50여 국가의 토목, 건축기술자가 모여 아부심벨의 유물 유적을 30톤 정도의 바위 덩어리로 잘게 잘라 천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 90미터 높은 지대로 옮겨 거기에 조립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적 이전 공사는 1965년 5월에 시작하여 무려 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집트 여행의 백미는 단연 아부심벨의 람세스 대신전과 네페르타리 소신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건 고대 국가의 웅장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자부할 만한 유적이었다. 고대의 유물들을 유네스코 주관 아래 전 세계적인 국가의 협력과 지원을 받아 현대적인 건축공법에 의거, 치밀하게 수면 위로 높이 이전하여 보존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아부심벨을 보고 난 감동을 지닌 채 카이로의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식당 주인은 한국인 여행 가이드를 겸한다고 하였다. 람세스 2세에 관한 얘기 끝에 미라의 보존 처리 문제를 위하여 프랑스로 갈 때 미라의 얼굴 사진을 찍고 여권도 만들었다고 했다. 미라에 여권? 생각지도 못한 에피소드였다. 람세스 2세 미라를 싣고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한 다음엔 국가 원수를 영접하는 예우로 예포를 발사하고, 의장대가 사열하였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문명과 문명의 조우라 할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인터넷으로 ‘람세스 2세 여권’을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당시의 여권을 링크로 찾아볼 수 있었다. 여권에 붙여진 까맣고 쭈글쭈글한 얼굴 사진⸺ 말년의 어떤 시인 모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단순한 여행 시로 이 이야기들을 시로 형상화한다면 그건 자칫 TV에 나오는 세계 테마기행 다큐멘터리만도 못한 시가 될 수도 있었다. 주절주절 주를 달고 시를 쓴다면 그것은 차라리 연구논문에 더 가까울 터이므로 전혀 내키지 않았다. 이래저래 람세스 주제로 시를 쓸 생각만 하면서 시상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두 달 넘게 끙끙거렸다.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람세스 2세의 여권에서 비롯된 이 한 줄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시는 강물처럼 유유한 흐름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람세스와 오벨리스크를 정점에 놓고 1인칭 시점으로 시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근대 이집트와 프랑스, 국가 간의 길항을 순화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벨리스크를 약탈당한 게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문명이 현대 프랑스를 정복하였으며 그 표지(標識)로 오벨리스크를 파리 중심부에 세워놓은 것이라고. 오늘날 K팝으로 상징되는 BTS가 전 세계 아미들의 가슴속에 환호성으로 파고들듯이, 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점정(點睛)을 이루듯이. 그리고 2024년 10월의 둘째 주 목요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을 호명한 것처럼.




흐르는 물 위에 번개 치다
―빈 손의 기억



   소년시절부터 저수지나 냇가에서 나는 물수제비 뜬 기억이 많다. 서귀포의 쇠소깍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기도 했다. 동글납작한 돌,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그런 돌을 손에 들고, 수면에 스칠 듯 말 듯 돌을 내쏘아야 하므로 알맞은 돌을 고르는 게 중요했다. 창던지기 자세처럼 왼 팔을 건너편 언덕을 향해 뻗고 오른손으로 힘껏 수면을 비스듬히 끌어당겨 던진다. 햇빛이 눈부신 가을날 오후였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를 돌아보고 오는 길.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매죽리. 웃매대 산허리에 묘소가 있고 아랫매대를 거쳐 칠보 방향의 차도로 올라서야 했다. 아랫매대 개울에서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다슬기를 잡고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다. 나는 허리 굽혀 물수제비 뜰 돌을 찾는다. 추석 무렵 아직 따가운 햇살에 달궈진 돌이 뜨겁진 않아도 온기가 넉넉하였다. 파팟팟팟… 힘껏 내쏜 돌멩이는 날아서 수면 위를 담방 담방 담방, 몇 차례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다가 스르르 잠긴다. 그 순간의 은빛 물방울들. 수정의 꽃이 핀다고나 할까 찰나의 환호성이 들릴 듯한 광경이다.

   손아귀에 쥐며 느낀 돌의 온기를 나는 둥우리의 갓 낳은 달걀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다. 어떤 달걀은 살짝 핏기가 스친 것도 있었다. 알은 생명체다. 비록 돌은 무생물이며 광물일 터이지만 수면에서 아주 짧은 찰나에 물을 만나 수정 왕관 같은 꽃, 영원한 생명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셋, 넷…. 그 찬란하고 가슴 떨리는 순간의 은빛 개화를 어떻게 말로 다 그려낼 것인가. 존재에 대한 순간의 자각. 그러나 너무나 짧게 그것은 무로 돌아간다. 아름다웠던 존재의 허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수정 꽃송이의 현현을 나는 시에서 어떻게 표현하나 고심하다가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라고 써내려갔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을 또한 아름다운 물의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유장한 물의 흐름에 비하면 그 수면에 나타날 수 있는 황홀의 극치는 얼마나 짧은 순간의 섬광일 것인가.

   내가 가장 애착하는 이 시는 2005년 9월 12일 초고를 썼고, 그해 《현대시학》 10월호에 발표했다. 2017년 한국시인협회는 2017년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간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문화올림픽의 일환으로 〈한중일 시인 축제〉를 개최하였는데 그 3개국 합동 시집에 나는 이 시를 냈다. 일본 시인들 너댓 명이 합동 시집을 읽은 그날 저녁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매력적인 시라고, 환상적인 시라고 반겨줬고 후쿠오카의 시인 야치슈소(谷內修三)는 귀국한 다음 이메일로 그 시에 대한 에세이를 내게 보내줬다. “2017년 9월 14일~17일까지 서울과 평창에서 〈한중일 시인 축제〉가 열렸다. 그것을 기념해서 『2017 한중일 시인 축제 시선집』이 발행되었다. 그 책 속에 아주 매력적인 시가 있다. 강인한의 「빈 손의 기억」이다.”라고 소개한 “아름다운 감동과 눈부신 무음 교향악의 매력 -강인한「빈 손의 기억」”이란 제목의 에세이(원고지 30매)다. 나는 카페 〈푸른 시의 방〉과 시집 『두 개의 인상』(2020,현대시학)에 우리말로 옮긴 그 에세이를 실었다.





절망의 겨울 암울한 시대의 판화
―불길 속의 마농 •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말도 안 되는 것을 말이라고 들이대던 시대였다. 1960년 4월 학생 의거로 민주주의의 희망을 보던 그 짧은 시기의 설렘을, 흥분을 생각하면 야릇하게 가슴이 떨린다. 외국 기자들은, 이승만 독재에 억눌려 살면서도 끽 소리 못하고 죽어 사는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정을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야유하였다. 그렇게 말할 것이 억눌려 살면서도 선거 때가 되면 돈 몇 푼, 고무신 한 켤레에 양심을 팔고서, 불법을 자행하는 여당을 지지하곤 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러나 4. 19 혁명이 있었다. 눈물겹게도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을 피운 사건이었다. 민주당 정권은 이 시기에 우리나라 경제개발 계획도 세우고 내각 책임제를 운용하였다. 물론 약간의 과도기적 사회 혼란이 있었다고는 하나 국가의 기반이 흔들릴 만큼 위험한 지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의 음모가 이 때부터 싹트고 있었음에 이르면 할 말이 없다.
   1961년 5월 이른바 5. 16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해방 전 해에 태어났기에 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일제치하에서 학교에선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라는, 일본 천황에 충성을 바치는 다짐의 글을 앵무새처럼 외워야 했다고 한다. 군사정권이 맨 처음 시행한 것이 그와 비슷한 「혁명공약」을 매일 아침 외우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다시 쓰레기통 속으로 처박히고 무려 30 년간 보류되었다.

   가장 먼저 군사정권이 손본 것이 대학이었다. 대학 신입생 정원을 종전의 사분의 일 혹은 오분의 일로 대폭 줄이고, 각 대학별로 치르던 입시제도를 단숨에 바꿔 전국적인 '국가고시(지금의 수능시험)'를 시행하였다. 그 합격자 수도 전국 대학 신입생 정원의 1. 5 배를 초과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가에서 대학 신입생 선발권을 장악한 이것이 교육 망국의 연원일 것이었다.
   사회가 안정되면 민간에 정부를 이양하고 군인은 다시 본연의 군으로 돌아가겠다던 '혁명공약' 마지막 조항은 한갓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서 대통령에 취임하던 그 날 그 통치자의 말이 생각난다. "이 나라에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행복의 절정에서 한 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고, 입에 발린 거짓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는 거짓말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행한 군인'을 추앙하는 군인이 1979년 12월에 또 다시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70년 이른 봄, 정인숙이란 미모의 젊은 여인이 죽었다. 편의상 위키백과에 실린 글을 옮겨 본다.

   정인숙 살해사건은 제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이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부근의 강변3로에 멈춰서 있는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권총에 넓적다리를 관통 당해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이미 숨진 한 젊은 여인이 발견되었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세), 숨진 여인은 정인숙(당시 26세)으로 두 사람은 남매 관계로 밝혀졌다. 나중에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소지품에선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26장이 포함된 33장의 명함이 쏟아져 나왔는데, 명단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등 대다수 5.16 주체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언론은 정인숙에게 숨겨진 아들(정성일, 당시 3세)이 하나 있고, 정인숙이 당시 정관계 고위층 전용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요정 '선운각'을 드나들었다는 걸 밝혀냈다. 1주일 후에 나온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오빠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정인숙이 듣지 않고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누이동생을 죽이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절대권력이 악취를 내뿜으며 부패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세 살 난 사내애를 안고 자랑스럽게 웃고 있는 미모의 젊은 여인의 사진 한 장. 그 아기의 귀가 영락없이 최고 권력자 누구 귀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세간에 파다했다. 그러나 훗날 그 똥물을 뒤집어 쓴 것은 정일권 총리였다.
   그녀가 죽기 불과 두 시간 전 어느 연예 담당기자가 정인숙을 보았노라 했다. 그 기자의 글을 보면 권력에 의한 죽음의 냄새가 느껴진다. 남산 중턱 타워호텔 18층의 나이트클럽에서 그녀는 세 번 네 번 밴드에게 똑같은 곡의 연주를 부탁했다고 한다.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릴리스 미'라는 노래. "나를 좀 놓아주세요. 떠나갈 수 있게 놓아주세요.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내게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답니다. 당신의 입술은 차갑지만 그이의 입술은 따뜻합니다." 라는 내용의 가사. 그녀는 일찍이 대학시절 메이퀸(오월의 여왕)으로 뽑힌 적도 있다고 하였다.
「불길 속의 마농」이라는 이 시는 정인숙을 서정적 자아로 내세워 쓴 시. 습작 노트를 보니 1972년 1월 22일에 완성한 작품이다. 한 달 전 1971년 12월 25일에는 명동에 있는 대연각호텔에서 화재 사고가 일어났었다. 불길이 치솟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호텔 객실 창문에서 숨막혀 괴로워하던 끝에 뛰어내려 죽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 모든 현장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사망 167명. 끔찍한 화재 사고였다.
   그 전 해인 정인숙 살해사건이 있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6가 평화시장에서 열악한 노동현장을 견디다 못해 전태일이란 한 청년이 분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은 모든 신문에 겨우 1단 기사로밖에 취급되지 않았었다. 언제나 그랬다. 중요한 국내 뉴스는 외신기사를 통해 전해지거나 기사의 행간에 숨어 있기도 했으며 기껏해야 1단 기사로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다방에서 수류탄을 들고 인질극을 벌인 무장 탈영병 이야기도 있었고, 불도저처럼 부수고 세우고 하는 밀어붙이기 식의 서울시 행정이 있었고, 도색잡지라 할 만한 주간지가 길거리에서 잘 팔리던 시기…….
   이 시는 이와 같은 시대 상황을 복합적으로 모자이크하여 쓴 것이었다. 대통령의 재선만을 허용한 헌법을 뜯어고쳐 '3선 개헌'을 전격적인 날치기 수법으로 통과시킨 건 1969년 9월이었다. 당시 절대적인 통치자는 절대로 헌법을 고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음에도 그게 몇 번째 거짓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만들겠다." 고 국민을 우롱하던 그의 말도 나는 지금 똑똑히 기억한다. 정말 암울한 시대, 엄혹한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연속이었던 시대, 그게 제3공화국 시절이었다.
   「불길 속의 마농」은 1972년 봄 《현대시학》의 '특집/ 60년대 50인집'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몇 달 뒤에 이른바 '10월 유신'이 자행된다. 마농은 아베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에서의 여주인공 이름. 시작 노트에 이 시에서만은 모든 문장부호를 뺄 것이라는 다짐의 메모가 보인다.

   유신 독재의 시기 대통령 선거란 장충체육관에서 여당 성향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만이 모여서 한 사람밖에 출마하지 않은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코미디에 불과하였다. 그 유신독재의 말기인 1979년 6월에 쓴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란 시는 1980년 4월호 《현대시학》에 발표되었다.
   '유비통신'이라는 말이 있었다. 유언비어, 곧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파되는 방식의 소문 통신이라고나 할까. 신문에 보도되는 사실보다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 더욱 더 진실에 가까운 그 절망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도 상당히 많이 있다. 입만 열면 고도 경제성장만을 하느님처럼 칭송하면서 한편으로는 재벌기업들의 폭리라든가, 최고 권력자 주변인들의 국가 정보를 통한 개발지역 땅 투기(오늘의 부동산 투기의 근원), 인권 탄압, 바른 말을 하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덮어씌우고서 죽여 버려도 할 말을 못하던 그 추악한 이면은 굳이 눈감고 보지 않으려 하면서…. 어쩌면 다시 그런 시대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역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와 반시》 2024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