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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별서(別墅) / 안도현

by 丹野 2024. 12. 3.

별서(別墅)

   안도현
  

배롱나무가 손을 연못에 담가 물을 퍼 올리네
연못에는 발목을 끌어당긴다는 소(沼)가 있지마는
나무는 매끈하게 몸을 씻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천지에 초록을 펼쳐 놓은 다음 홍등을 내걸고
불이 꺼지면 다시 등을 분주히 달면서 부풀어지네
저 백일 붉다는 꽃에게도 사나흘은 파란이 있었으리
한 꽃이 수면에서 뛰어올라 가지 끝에 달라붙네
그러자 또 한 꽃이 덩달아 따라 뛰어오르느라
연못에는 발 딛는 꽃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들이 왁자하네
때로 번개가 찢어진 수면을 꿰매려고 달려들었지마는
가련하고 무례하고 성의 없는 호통은 밀쳐 두었네
평생 꽃을 달고 싶으면 꽃자루나 되라지
나는 연못을 움켜쥔 저 배롱나무의 밑동처럼
봉당에 널브러져 비천하게 늙어 갈 궁리를 하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웹진》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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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이 있음.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