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284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외 2편) / 고 영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외 2편) 고 영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꽂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가출 아주 평화롭게식탁 위에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다접시 속에 살던 새 한 마리.. 2024. 12. 9. 문장(紋章) / 서영처 문장(紋章) 서영처 몸 밖으로 가시를 발라낸 장미는활어처럼 고운 살냄새를 풍긴다얼룩이라곤 없는 뽀얀 꽃이 피어난다식탁 가장자리 비싼 접시처럼 향기를 뿜어낸다장미의 문장을 쓰는 가문이 있었다장미의 생 이면에 창과 방패가 꿰어져 있듯나의 생 이면에 승자와 패자의 기승전결이녹슨 칼처럼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것 같다비는 종종 학생들이 시험지를 채우느라다급하게 펜을 두드리는 리듬을 포획해 온다허기진 닭들이 정신없이 모이를 쪼아먹는 소리와 흡사한때로 경기병들의 말발굽 소리를 강탈해 오기도 한다비를 맞은 이파리는 찢긴 영수증 조각처럼 흩어진다장미에 대한 어떤 예우도 없는 하루비에서는 먼 항구의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계통수를 거슬러 올라가도 장미 속에는 어류가 없고또 다른 장미가 있고나아갈 수도.. 2024. 12. 9. 풍등(風燈) / 강인한 풍등(風燈) 강인한 그대의 손이 사라진다.전 생애의 적막이 사라진다. 제 뿌리를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려나무들이 배경에서 떠나가는 시절이다. 어두운 하늘 속저마다 혼자씩 사라진다.그대의 손이 내 비루한 추억을 뿌리치고사라진다. 어두운 하늘 속을하늘보다 더 어두운 마음 안고이승엔 듯 저승엔 듯낙엽이 진다. ―시집 《장미열차》 2024 《불교평론》 2024년 여름호 2024. 12. 9. | 산문 | 내 시에 관한 이야기 셋 / 강인한 | 산문 | 내 시에 관한 이야기 셋 강인한 람세스 2세가 파리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상징 의미―파리를 방문한 람세스2세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는 건 여행의 속성이다. 때로는 새벽같이 나서서 길 떠나는 준비가 성가시기도 하나 기대에 찬 설렘은 괴로움을 상쇄한다. 그런데 기껏 새벽같이 나서서 오랜 시간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이 허접한 관광 상품을 파는 곳이었을 때 여행 전체가 실망스러워지는 게 패키지여행의 단점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유여행을 많이 선호하는 편인데 판에 박은 관광 설명을 해주는 가이드를 만나는 건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오래전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보고 개선문 거리에 서보기도 하고 무슨 공원 광장에 선 오벨리스크를 보기도 하였다. 외국에서 선물로 .. 2024. 12. 9.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2세 외 9편 / 나의 대표시_ 강인한 나의 대표시_ 강인한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2세 외 9편 삼천 년도 훨씬 지나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스쳐 가는 존재들, 철없는 것들,공포의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으리.아랍 놈들이 코를 뭉개고, 영국 놈들이수염과 턱을 깨부수고 마침내스핑크스는 눈도 빠지고 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돛배를 타고 이승, 저승을 오가는 검은 태양. 한 나라의 역사란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저것은 일찍이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트랩이 내려지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팡파르,공항이다.엄정.. 2024. 12. 9. 별서(別墅) / 안도현 별서(別墅) 안도현 배롱나무가 손을 연못에 담가 물을 퍼 올리네 연못에는 발목을 끌어당긴다는 소(沼)가 있지마는 나무는 매끈하게 몸을 씻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네천지에 초록을 펼쳐 놓은 다음 홍등을 내걸고불이 꺼지면 다시 등을 분주히 달면서 부풀어지네 저 백일 붉다는 꽃에게도 사나흘은 파란이 있었으리 한 꽃이 수면에서 뛰어올라 가지 끝에 달라붙네 그러자 또 한 꽃이 덩달아 따라 뛰어오르느라 연못에는 발 딛는 꽃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들이 왁자하네 때로 번개가 찢어진 수면을 꿰매려고 달려들었지마는 가련하고 무례하고 성의 없는 호통은 밀쳐 두었네 평생 꽃을 달고 싶으면 꽃자루나 되라지 나는 연못을 움켜쥔 저 배롱나무의 밑동처럼봉당에 널브러져 비천하게 늙어 갈 궁리를 하네 ―사이버문학.. 2024. 12. 3. 서포에서 / 나호열 https://prhy0801.tistory.com/m/15686191 서포에서경남 사천시 서포에서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어떤 거만함도, 위세의 발자국도멀리서 달려와 발밑에 부서지는 포말에 눈이 먼 기도문이 된다. 바다의 푸른 팔뚝에 문신처럼 prhy0801.tistory.com 2024. 11. 23. 모래시계 속의 낙타 / 김경성 [김경성] 모래시계 속의 낙타 - https://www.cn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6 [김경성] 모래시계 속의 낙타(문화앤피플) 이해경 기자 = 모래시계 속의 낙타김경선타클라마칸에서 온흙으로 빚은 낙타 한 마리를 들어 올리자쏟아지는 사막의 모래똑바로 세워놓을 수 없는 모래시계가 낙타의 울음을 머금www.cnpnews.co.kr #김경성 시인 #문화앤피플 #이혜경 기자 #모래시계 속의 낙타 #사막 #낙타 2024. 11. 14. 거푸집의 국적 외 2편 / 황정산 거푸집의 국적 황정산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코드 블랙 (외 2편) 황정산 떼로 오는 것들은 아름답다 별들이어도 박쥐여도 어지럽히고 냄새나는 것들이어도 몰려.. 2024. 11. 8. 응급실 가는 길 / 김행숙 응급실 가는 길 김행숙 올여름은 모든 게 다 체온과 비슷하게 35도, 36도, 37도쯤에 매달려 있어. 삐죽삐죽한 초록, 초록, 초록의 잎들도 38도쯤. 상갈파출소 사거리의 신호등도 39도쯤. 붉은 신호등처럼 피에 젖은 단 한 사람의 눈동자도 39.5도쯤. 축 늘어진 아이 를 업고 세상은 응급실에서…… 응급실로 뺑뺑이를 돌고 있어. 만져지는 것들이 다 피 같고 피떡 같고…… 제기랄, 나는 내가 더러운 누비옷 같은데 벗겨지지 않아 질질 끌리네. 또 한숨도 못 잤어. 잠을 못 잔 사람들이 40도의 잠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아. 거리에서 너를 사랑했던 이유로 너를 미워하고…… 여름을 좋아했던 이유로 다 함께 정오의 여름을 증오하며 그늘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물끄러미 자기 그림자를 응시하는 순간이 있.. 2024. 11. 8. 이전 1 ··· 3 4 5 6 7 8 9 ··· 4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