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인문학/파미르 고원188 배롱꽃 / 남아있는 나날들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저 나무 곁을 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말을 남기고 갔을까? 어떤 말을 들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비처럼 나도 모르는 내안의 내가 나에게 주는 황홀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숨 참고 바라보았던 숨 참고 셔터를 눌렀던 나무의 숨을 바람의 궁전에 저장해놓는다. 2022. 8. 26. 배롱꽃 /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비늘 꽃을 피워 올렸다 물고기를 읽는 순서 김경성 그렇게 많은 비늘을 떼어내고도 지느러미는 한없이 흔들린다 물속의 허공은 잴 수 없는 곳이어서 헤엄을 쳐도 늘 그 자리에서 맴돌 뿐 휘감아 도는 물속의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비늘 꽃을 피워 올렸다 붉은 몸 이지러졌다가 다시 차오르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뜨거움이 차올라서 목울대에 걸릴 때면 비늘 한 장씩 내려놓다가 한꺼번에 쏟아놓으며 길을 찾아서 갔던 것이다 석 달 아흐레 동안만 눈을 뜨고 당신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감기지 않는 눈을 덮은 비늘, 마지막 한 장 떼어내며 당신의 눈 속에 들어가 있는 나를 찾았을 때 뼈 마디마디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여울에 화살처럼 박히던 소나기도 제 갈 길로 가고 뭉게구름 물컹거리며 돋아 오르고 있었다 비늘 다 떨구고 뼈만 남.. 2022. 8. 26. 물이 든 어떤 새의 말 #5 새 한 마리가 무리와 떨어져서 혼자 문자를 쓰고 있습니다. 젖은 입술이 마르지 않게 물에 적셔가며 콕콕 씁니다. 쉼표이거나 말줄임표이거나 어떤 말이어도 좋을 그런 문자를 씁니다. 이따금 물음표 같은 갯지렁이를 본문 바깥으로 내보내기도 하면서요. 세상의 모든 풍경은 단 한 번 뿐이라는 어느 사진작가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새 한 마리를 오래 바라봤습니다. 저도 저 새처럼 그런 시 한 편 쓰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면서요. 저, 새의 몸짓 하나하나 다 바라봅니다. 마치 그날인 듯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서 새를 바라봅니다. 2022. 8. 26. 물이 든 어떤 새의 말 #4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요. 저 새들의 이름을 한 마리 한 마리 불러주고 싶었습니다. 물결의 무늬가 다 다르듯 새들의 모습도 모두 다릅니다. 저는 새들의 이름을 부르고 새는 저의 이름을 부르고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단풍나무 속에서 어린 새가 살고 있습니다. 새벽 무렵이면 쓰쓰습 씁씁 겨우겨우 나오는 소리로 어미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것 같습니다. 그 새소리를 들으려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어린 새의 소리를 저는 압니다. 2022. 8. 26. 물이 든 어떤 새의 말 #3 저 물의 결을 좀 보아요. 프랑스 블망레이스를 펼치듯 부드럽게 부드럽게 밀려오는 밀물. 새들이 레이스 위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밀물이 밀고 오는 물고기를 찾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요. 저 풍경을 바라보는 저는 또 무엇을 잃어버렸던 것일까요?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 붉게 물들고 말았습니다. 2022. 8. 26. 물이 든 어떤 새의 말 #2 새는 새의 말을 하고 저는 저의 말을 하고요. 새는 저의 말을 듣고 저는 새의 말을 듣고요. 바다가 제 속을 다 드러낸 해 질 무렵. 아주 먼 바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저렇게 새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 그렇게 새만 보면 자석에 이끌리듯 다가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떨어진 깃털만 봐도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일까요? 저는 전생에 새였을까요? 나무였을까요? 바람이었을까요? 물이었을까요? 2022. 8. 26. 물이 든 어떤 새의 말 #1 기다림의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말의 의문부호를 다 지우고 눈에 보이는 그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너머까지 고요하게 읽고 싶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저 풍경 속에 오롯이 들어갔으니 더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겹겹이 밀려오는 조금의 물결, 저 결 속으로 낮게 엎드려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2022. 8. 26. 여름 : 그 바다 #6 시간의 풍경 - 바닷물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멀어지고,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허옇던 달이 빛나기 시작했고, 붉은 하늘이 효색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바다를 빠져나왔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간의 풍경 속에 들어가 있던 우리는 말문을 닿고, 젖어있는 바람과 새와 바다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 안에 들였다. 우리들 여행의 방식은 그렇게 서로를 놓아주는 것, 함께 여행을 하지만 혼자 인 듯한 사색의 시간을 무한정 주는 것, 그윽한 눈으로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봐 주는 것, 언젠가 발아할 시의 씨앗을 우리의 마음 안에 온전하게 들이는 것, 피아노 연주를 하는 그대도 마음 안으로 해조음을 들이는 것, 그러나 마음은 함께 흘러가는 것,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2022. 7. 18. 여름 : 그 바다 #5 바다 끝에 서서 윤슬과 바다의 결을 보았다. 2022. 7. 18. 여름 : 그 바다 #4 바닷속에 들어가서 바다 끝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울여울, 어떤 할 말이 있다는 듯 천천히 가는 것 같았으나 바람과 물이 섞이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수평선으로 갔다. 2022. 7. 18. 이전 1 2 3 4 5 6 7 8 ···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