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284 시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 유홍준 교동도 느티나무 2018년 3월, 저물 무렵시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경험을 바탕으로유홍준 1. 삶에서 찾아라 안녕하십니까. 시를 쓰는 유홍준입니다.저는 오늘, 여태 시를 써오면서 경험한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제가 실제 아는 게 별 게 없어서이기도 하구요, 시중에 많은 이론서들이 나와 있지만 그것들이 시 쓰기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또 그렇기도 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공장 노동자로 일할 때 등단을 했습니다. 하얀 종이를 만들던 제지공장 제지공이 저의 직업이었지요. 꽤 오랜 기간 그 일을 했는데요, 종이를 만들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 남다른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종이공장 제지공인 시인! 나름 멋이 있지 않나요?.. 2024. 12. 28.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 김이듬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질녘 남쪽 해변에 도착했다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여기 많다고동이 맞는 말이야? 지금이 간조야? 만조야? 너는 뛰어다니며 큰소리로내게 묻는 건지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헷갈리잖아 어두워가는 갯벌 위엔 길지 않은 금이 많다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흔적인지자취인지생존 발각될 단서인지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고둥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부득이 나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 2024. 12. 28.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 김형로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김형로 아버지 그곳에도 뭇국이 있나요 먼 부엉이 울음 같이 눈은 오고하얀 숨으로 밤은 지워지고귀 세우면 눈 쌓이는 소리 사락사락 봄 춘 자 들어간 그 도시 기억나네요어린 우리는 눈굴로 숨어들고눈은 깔깔 웃음을 삼키고우린 늦은 밤 뭇국을 먹었죠 나 어쩌다 세상에 나와져서아버지를 만나눈 뭉치듯 살과 뼈 붙이고이제 먼 나라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눈 오는 밤 여물지 못해서 어디 쓰겠냐하얀 공책 뒤 적어놓은 그 아들,그럭저럭 뭇국 정도는 되었으니 눈 오는 밤창을 열면 아름드리 팽나무 위로사분사분 세상 커지는 소리눈굴 닫히는 소리 아득한—뭇국 같이 먹고 싶네요세상은 박꽃처럼 밝아오고아버지와 나는 기억으로 환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뭇국 앞에사각사각 달그락달그락아버지와 나는 그때처럼 .. 2024. 12. 28. 회색 코트 / 강기원 회색 코트 강기원 이른 아침회색 코트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날로 헐거워진다몸이 줄어드는 걸까할 일은 점점 늘어나는데 헐렁한 코트를 입고 지하철 속에몸뚱이를 간신히 밀어 넣는다날로 사람들이 많아진다인구가 줄어 큰일이라는데 사무실에 도착해바퀴 달린 검은 의자에 털썩의자는 날로 움푹 패인다체중은 줄어드는데 바퀴가 달렸으나 달리지 않는의자점점 웅덩이가 되어간다, 언젠가의자 속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가 뜰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회색 코트 한 벌이퇴근 시간의 지옥철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코트 속에 있어야 할 몸이 없다 아뿔사!코트는 몸뚱이를 잊고, 잃고혼자서 실려간다 통조림 속 정어리처럼 꽉꽉 들어찬사람들 사이에서발도 없이 붕 뜬 채 ―계간 《시인시대》 2024 겨울---------.. 2024. 12. 28. 쉬어가는 페이지 / 김건영 쉬어가는 페이지 김건영 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한데 섞을 것을 부러 따로무치고 볶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먹고 사느라모든 시와 노래가 나를 지나쳐 흘러가네 책은 먹을 수 없는데쌓이고 있다 펼쳐 놓은 페이지는 쉬어가고 있다 나물 볶는 냄새는 거실을 넘어서책 사이로 흘러든다 기의를 기울이면쉬어가는 페이지 읽지도 않고 쌓아 놓은 책들도 쉬어가고 있다말이 쉬어갈 때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사람도 쉬어가고 있다말을 다루는 사람들이 섞이고 있다쉬어가는 말이 쌓이고한데 섞일 말들이 낱낱이쉬어가고 —계간 《문학들》 2024년 겨울호----------------------김건영 /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미디어창작학부 졸업. 201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파.. 2024. 12. 28. 아무 날의 당나귀驢 / 김승필 아무 날의 당나귀驢 김승필짐을 진다는 것은그 끝이 어딘지 모르는 일진통제 1㎎이 너무나 무거웠다는어느 시인의 말을 뒤로뚜벅뚜벅 걸어별량別良에 도착했다붙잡아두고 싶은 당나귀가 생각나서나는 응앙응앙, 하고 울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붉은 장화를 신다 말고 걷기 시작했다당나귀를 쓰러트리는 것은마지막 짐이 아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인도 속담.- 《씨글》Vol.7 2024년 하반기.#김승필시인 #아무 날의 당나귀驢 2024. 12. 24. 너트와 볼트 / 김경성 너트와 볼트 김경성 나는 사라진다너도 사라지고 우리 모두 사라진다그 후 오랫동안 서로를 들여다본다 아주 작은 내가 당신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힘껏 조일 때 비로소 한 세상이 열린다 그 누구라도그 무엇이어도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당신과 나개울을 건너고 강을 건너며이쪽과 저쪽을 잇는 첫길이 되어흘러가는 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다면맞닿아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우리로부터 번지는 파장느슨해진 세상을 여민다-월간 2024년 10월호 2024. 12. 19. 물의 가면 / 김경성 물의 가면 김경성 물속에 갇힌 나무가 있었다물결이 나무를 휘감으며 흘러갔다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가지를 늘어트려서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어떤 말들을 써 내려갔다하냥 물꽃이 피었다 봄부터 품어온 연두가 시간의 켜를 입고 빛을 받은 이파리의 문양은 수만 가지 색을 품고 있었다 물 비침이 없는 날이 많아졌다나무는 얼음판에 먹지를 대고 이파리 한 장 없는 그림자로 길을 찾고 있었다 갇힌 것은 나무가 아니라 강물이었다 천천히 봄이 오고 얼음 가면이 사라지며 출처를 모르는 물길이 숨을 고르면서 나무의 몸속에 있는 푸른 귀를 불러냈다 강가에 수풀이 일어서는 무렵허리가 휜 여뀌꽃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며꽃무늬 낙관을 낭창낭창 찍고 있었다 (월간 2024년 가을호 2024. 12. 19. 칸나의 방 / 김경성 칸나의 방 김경성 붉은 칸나 꽃 색을 다 거두고넓은 잎에 그림자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바람 불 때마다 안개를 묻힌 듯 아득해진다 새 한 마리 검은 그림자를 끌고 왼편으로 날아간다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너무나도 선명한 그림자맑은 햇빛이 태워버렸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는 그저 바라본다 당신은 멀리 있고 칸나는 너무 가까이 있어점점 더 타오르는 칸나의 붉음을 어찌하지 못해치마를 돌돌 말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몸을 잘 접어 키 큰 칸나아래 누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한 생을 다 살아버린 듯칸나 아래 누워서 칸나의 붉음을 입는다달아오른 마음까지도 온통 칸나빛이다 -월간 2024년 10월호 2024. 12. 19. 분절음 / 김경성 분절음 / 김경성 와편에 새겨져 있는 물고기 등뼈가 이지러져 있다 아가미를 드나들던 숨도 지느러미와 함께 사라졌다부레의 힘으로 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는 물고기의 집은 물속이 아니었다 몇 장 남아있는 비늘을 지문처럼 지층 속에 넣어두고오랫동안 저 자리에 있다 흩어져 있는 조각을 보며 누군가의 집이었다고 예감할 뿐사용흔으로 내력을 다 읽기에는 시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뼈가 시큰거린다, 짜 맞추어져 있던몸의 언어가 해체되는 중이다 뼈마디 사이에 둥근 집이 있어서 몸을 비틀 때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어긋난 뼈를 추스르며 흩어져 있는 조각을 맞춰본다기울어진 내 그림자가 비어있는 퍼즐을 덮으며 한 풍경이 된다 어골무늬 선명한 와편 하나를 몸에 끼워 넣는다흩어졌던해체되었던문장이 하.. 2024. 12. 19. 씨가시 올금 연지 */ 김경성 씨가시 올금 연지 */ 김경성 소주됫병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끊어낼 수 없는 유전자는 언제나 대기 중이고마음속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저 비의를예측할 수 없어 아득하다 숨길을 막고 있는 병마개는 언제쯤 열리나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백 년 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이작은 풀꽃이 세상을 끌고 왔다 잘 영근 씨앗을 병 속에 넣어두고봄을 기다렸던 사람은 꽃봄을 만나지 못하고 먼 길 떠났다 당신의 심장에 손을 대면 두근거림이 전해오듯이씨앗을 넣어두고 말문을 닫은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그 마음 알고 싶어 병 속 깊이 들여다보며 씨눈을 찾아본다 봄이 오면 가득히 피어나고 싶어서단단하게 몸을 여민 씨알들개밥바라기별 옆에서 잠에 들면 꽃이 피어나는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 씨앗은 병속에 갇혀 있고씨.. 2024. 12. 19. 나의 이름을 지우고 / 김경성 나의 이름을 지우고 김경성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어느 먼 곳에 있는 이름을 가져와야 하나요 폐사지에서 몇 백 년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5층석탑이라고 써도 될까요 화르르 바람에 물려 입술문자를 쓰는 꽃잎이 되어 시간을 잃고 함께 흘러가는 오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 앉아 바라보는 탑 너머로 펄럭펄럭 낮게 날아가는 쇠백로처럼자꾸만 어딘가로 흘러가는 마음 움켜잡았습니다 무릎 꿇고 엎드려서 바라보는 꽃황새냉이는왜 그렇게 흔들거리는지요탑돌이를 하던 사람들의 마음 소리를 들었던탑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습니다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하고정거장 이정표도 없는 갓길에서 너무 늦게 오는 버스를 타고낯선 마을 모퉁이를 돌 때마다예감처럼 보이는 그 무엇을 보고는어떤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았습니다 (66한국시인> 2024년 .. 2024. 12. 19. 이전 1 2 3 4 5 6 7 ··· 35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