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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845

빛이 내린 숲 / 정현우 빛이 내린 숲 정현우 식탁 위에 은수저가 잡히지 않는다나의 꿈 바깥으로 칼날이 지나간다부드러운 빵이 놓이고밤은 완연하고 나무들의 걸음을 옮길 수 없다 ​ 여긴 아직 우리 집이야, 창밖 숲이 일어서고 검은 숲의 은유가 잠을 지운다 ​ 활강하는 흰 매들과 혼곤히 시작되는 숲의 시작과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지는 알 수 없다햇빛이 혼들리는 물결,빛을 도래하는 잎맥의 혈관이 투명하다심장은 몸 밖으로 자라는 것,빛으로 짜인 모자이크, ​ 새는 검푸른 심장을 끌어안고 햇살은 어둠을 거둬들이고, 죽은 당신의 꿈속을 지나가는 함구 속으로 자유의 집과 동물과 언덕과 나무들을, 이 숲의 시간은 잎이 지는 반대쪽으로 흐른다 과거로 이어지는 시간을 생각하며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손거울이 보인다 미간에 금이 간다 서.. 2025. 3. 8.
그리운 중력重⼒ (외 1편) / 강영은 그리운 중력重⼒ (외 1편) ​ 강영은 ​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2025. 3. 8.
창신 빌라 / 김승필 [김승필] 창신 빌라 - https://naver.me/FW6gxZek [김승필] 창신 빌라창신 빌라김승필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이 있다 태풍 매미로 어미 아비 잃은 일층 봉구슈퍼 사내아이들이 좁아터진 방에서 창문을 벌컥 열어두고 잠을 잔다 팔뚝을 서로 포개놓고 www.cnpnews.co.kr 2025. 3. 6.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외 2편) / 김태형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외 2편) ​   김태형 ​ 며칠 전 작은 구름 하나가 지나간 곳을 찾아가는 중입니다풀을 뜯으러 가고 있습니다몇 방울 비가 내린 자리에 잠시초원이 펼쳐지겠지요이름을 가진 길이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도이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물어봅니다이름이 없는 길을한 번 더 건너다보고서야언덕을 넘어갑니다머리 위를 선회하다 멀찌감치 지나가는 솔개를이곳 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또 물어봅니다언덕 위에 잠시 앉아 있는 검독수리를하늘과 바람과 모래를방금 지나간 한 줄기 빗방울을끝없이 펼쳐진 부추꽃을밤새 지평선에서부터 저편으로건너가고 있는 별들을그리고 또 별이 지는 저곳을여기서는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어봅니다어떤 말은 발음을 따라 하지 못하고개울처럼 흘러가는 소리만을 들어도 괜찮지만이곳.. 2025. 3. 2.
모래시계 / 서혜경 https://www.cn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10 [서혜경] 모래시계모래시계서혜경한 여자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황토 방 안에 있던 눈들이일제히 모래시계를 바라본다모래시계에구겨 놓은 삶이 기지개를 편다오랜 세월 시린 무릎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뜨거www.cnpnews.co.kr 2025. 2. 21.
구로디지털단지를 지나간다 / 조하은 https://www.cn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27 [조하은] 구로디지털단지를 지나간다(문화앤피플) 문화앤피플 뉴스 = 구로디지털단지를 지나간다조하은겹겹이 껴입은 겉옷을 한 꺼풀 두 꺼풀 벗고 욕조에 비스듬히 누웠다적당한 온도의 물로 딱딱한 몸을 부드럽게 녹여보는데몸 www.cnpnews.co.kr 2025. 2. 21.
그 섬 거문도 / 최경선 https://www.cn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39 [최경선] 그 섬 거문도그 섬 거문도최경선 곱발 디디면 바다가 보이는 고만고만한 돌담 집이거나 얼기설기 묶인 지붕 너머 바다의 정수리가 훤히 보이거나 몇 발짝 골목을 나서면 시푸른 바다로 통하는 곳이다 혀 둥www.cnpnews.co.kr 2025. 2. 21.
눈치 없이 핀 꽃 (외 1편) / 정선희 눈치 없이 핀 꽃 (외 1편) 정선희 엄마는 금기어였다 금기어를 키우지 못해서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녀의 손이 목련 비늘처럼 떨어졌다 새는 남쪽 나라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목에 걸린 가시를 밥과 함께 꿀꺽거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울지 않는 아이의 눈꼬리는 길다한글보다 눈치를 더 빨리 깨친다 엄마 없는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잘 숨기고 들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 오랫동안 무언가 목에 걸려물을 마시고 기침을 해도 내려가지 않는다말을 할 때마다 캑캑거렸다 의사가 매핵기라고 해서잔기침을 쏟았다삼켜지지 않는 말들을 울대에 붙인 채 살고 있나요? 매화꽃 지면 탐스런 매실과 함께엄마라는 시큼한 금기어도 주렁주렁하다 새를 바라보는 서쪽의 시간 한 몸짓이 생의 단면에부딪히고 있다 유리벽.. 2025. 2. 10.
겨울을 잃고 나는 (외 2편) / 한혜영 겨울을 잃고 나는 (외 2편) 한혜영 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소금기에 푹 절여진 꼬리를 끌고 해안가를 어슬렁거려요 마음은 죽을 자리를 찾는 늙은 늑대 같기도 하고 조문을 다녀가는 시든 꽃 같기도 하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깃발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겨울을 잃은 것들은 다 그래서 혀가 포도나무 덩굴처럼 길어졌어요 살려면 닥치는 대로 생각을 잡고 올라야 해요 아니면 녹아서 줄줄 흐르니까 얼음조각처럼 잘 생긴 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이 바닥에 질펀해요 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혈관을 끌고 서늘한 굴을 찾아가지요 ​ 저기서 시계바늘을 휙휙 돌리는 여자! 아직도 홈쇼핑의 채널을 지키네요 세상엔 없는 계절을 파는, 소.. 2025. 2. 10.
레몬의 창가에서 (외 2편) / 지관순 레몬의 창가에서 (외 2편) 지관순 나무를 잠가버린 건 내 잘못가지가 환해지려면 우정이 필요하고 레몬의 신맛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대해질 수 있다 레몬의 말투를 우려낸 창틀무릎선을 눈썹까지 밀어 올린 지붕들땅딸보 아저씨네 강아지는 아직도 꽃씨를 물어뜯을까 레몬을 반으로 자르면 세계에 불이 켜진다 말하자면흰 고양이의 춤과음표를 파고드는 손가락무혐의를 흔드는 저녁의 지느러미 고백하는 것만으로 창가는 어두워지고 레몬을 모두 꺼버린 나무 아래너와 내가서로의 절반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잘 부탁해풀밭 서재에 꽂힌 어느 계절의 안녕들그러니까 한 번 열리면 닫히지 않는 레몬의 저녁들 부불리나의 침대 오르탕스 부인보다는 부불리나, 그렇게 불러주세요무슨 나팔 이름 같지만 이것은내 허리에 감았던 깃발을 기념.. 2025.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