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844 완연히 붉다 / 김명리 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활시위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김명리 /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 2025. 1. 4. 검은염소의 저녁 / 김명리 검은 염소의 저녁김명리어른어른한 물그림자 같은땅 속의 거미들이고요의 한가운데까지 몰려오는 이런 저녁엔잘못 들어선 봄의 모퉁이 같은중국식당에서혼자 짜장면을 먹는다채마밭이 한눈에 들어오는거름냄새 풍기는 국도변의 중국집엔손님이라고는 나 혼자뿐어딘지 모르게낡은 예배당 기우뚱한 첨탑 같은 벼랑끝에서그토록 오래 서성이면서결코 뛰어내리지는 않는한 마리 검은 염소의길다란 동공 같기만 한검은 국수를 먹는다꽃도 아직이고 잎도 아직인 봄날 저녁에ㅡ계간 《시인시대》(2024, 겨울호)-------------김명리 / 198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물보다 낮은 집』『적멸의 즐거움』『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제비꽃 꽃잎 속』『바람 불고 고요한』. 산문집 『단풍객잔』이 있음. 2025. 1. 4. 물방울 / 이산하 물방울 이산하 아기 때 할머니가 달걀을 앞에 놓고나한테 잡아 보라고 했다.나는 방바닥을 겨우 겨우 기어가며움켜잡아 보려고 애썼지만손끝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밀려나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았다. 모슬포에서 알뜨르비행장을 지나고 송악산을 거쳐도어느 곳이든 다른 비가 오고 다른 바람이 불었다.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착하면 더욱 좋은 곳넓은 정원의 배롱나무 그늘 아래고요히 잠든 나무 주인의 이름이 작은 돌에 새겨진제주도 서귀포 저지문화예술인 마을의 김창열미술관 거기 난공불락의 물방울이 있었다.어릴 때 끝내 잡히지 않았던거기 난공불락의 달걀이 있었다.나는 달걀 하나를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달걀 너머의 그 어떤 세계를 취하려고 한 것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고 깊이 잠들면 배롱꽃이 되어 .. 2024. 12. 31.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 김이듬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질녘 남쪽 해변에 도착했다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여기 많다고동이 맞는 말이야? 지금이 간조야? 만조야? 너는 뛰어다니며 큰소리로내게 묻는 건지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헷갈리잖아 어두워가는 갯벌 위엔 길지 않은 금이 많다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흔적인지자취인지생존 발각될 단서인지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고둥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부득이 나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 2024. 12. 28.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 김형로 뭇국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김형로 아버지 그곳에도 뭇국이 있나요 먼 부엉이 울음 같이 눈은 오고하얀 숨으로 밤은 지워지고귀 세우면 눈 쌓이는 소리 사락사락 봄 춘 자 들어간 그 도시 기억나네요어린 우리는 눈굴로 숨어들고눈은 깔깔 웃음을 삼키고우린 늦은 밤 뭇국을 먹었죠 나 어쩌다 세상에 나와져서아버지를 만나눈 뭉치듯 살과 뼈 붙이고이제 먼 나라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눈 오는 밤 여물지 못해서 어디 쓰겠냐하얀 공책 뒤 적어놓은 그 아들,그럭저럭 뭇국 정도는 되었으니 눈 오는 밤창을 열면 아름드리 팽나무 위로사분사분 세상 커지는 소리눈굴 닫히는 소리 아득한—뭇국 같이 먹고 싶네요세상은 박꽃처럼 밝아오고아버지와 나는 기억으로 환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뭇국 앞에사각사각 달그락달그락아버지와 나는 그때처럼 .. 2024. 12. 28. 회색 코트 / 강기원 회색 코트 강기원 이른 아침회색 코트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날로 헐거워진다몸이 줄어드는 걸까할 일은 점점 늘어나는데 헐렁한 코트를 입고 지하철 속에몸뚱이를 간신히 밀어 넣는다날로 사람들이 많아진다인구가 줄어 큰일이라는데 사무실에 도착해바퀴 달린 검은 의자에 털썩의자는 날로 움푹 패인다체중은 줄어드는데 바퀴가 달렸으나 달리지 않는의자점점 웅덩이가 되어간다, 언젠가의자 속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가 뜰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회색 코트 한 벌이퇴근 시간의 지옥철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코트 속에 있어야 할 몸이 없다 아뿔사!코트는 몸뚱이를 잊고, 잃고혼자서 실려간다 통조림 속 정어리처럼 꽉꽉 들어찬사람들 사이에서발도 없이 붕 뜬 채 ―계간 《시인시대》 2024 겨울---------.. 2024. 12. 28. 쉬어가는 페이지 / 김건영 쉬어가는 페이지 김건영 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한데 섞을 것을 부러 따로무치고 볶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먹고 사느라모든 시와 노래가 나를 지나쳐 흘러가네 책은 먹을 수 없는데쌓이고 있다 펼쳐 놓은 페이지는 쉬어가고 있다 나물 볶는 냄새는 거실을 넘어서책 사이로 흘러든다 기의를 기울이면쉬어가는 페이지 읽지도 않고 쌓아 놓은 책들도 쉬어가고 있다말이 쉬어갈 때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사람도 쉬어가고 있다말을 다루는 사람들이 섞이고 있다쉬어가는 말이 쌓이고한데 섞일 말들이 낱낱이쉬어가고 —계간 《문학들》 2024년 겨울호----------------------김건영 /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미디어창작학부 졸업. 201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파.. 2024. 12. 28. 아무 날의 당나귀驢 / 김승필 아무 날의 당나귀驢 김승필짐을 진다는 것은그 끝이 어딘지 모르는 일진통제 1㎎이 너무나 무거웠다는어느 시인의 말을 뒤로뚜벅뚜벅 걸어별량別良에 도착했다붙잡아두고 싶은 당나귀가 생각나서나는 응앙응앙, 하고 울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붉은 장화를 신다 말고 걷기 시작했다당나귀를 쓰러트리는 것은마지막 짐이 아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인도 속담.- 《씨글》Vol.7 2024년 하반기.#김승필시인 #아무 날의 당나귀驢 2024. 12. 24. 늙은 말 / 김 윤 늙은 말 김 윤 말은 이미 늙었고 진흙탕 속에 서서 비를 맞았다젖은 속눈섶을 떨고 있었다 동네 끝에 말집이 있었다우리는 마구간 앞에 서서 말을 쳐다보는 일이 많았다 종일 수레에 장작을 실어 날랐다길에 멈추어 서면 채찍으로 맞았다 말은 서서 잔다자는 말에게 남자애들이 돌을 던졌다 나는 눈을 가리고 울었다 그 옛날 늙은 암말이 내 속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말은 무릎이 아프구나아직도 비를 맞고 있구나 나는 다 잊어버렸다늙은 말은 지름길을 알아서 말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 ―계간 《시와 함께》 2024년 겨울호------------------김윤 /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지붕 위를 걷다』 『전혀 다른 아침』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등. 2024. 12. 17. 12월의 귀 / 심재휘 12월의 귀 심재휘 귀를 베고 잤더니 귀가 아팠다12월의 소식도 아팠다오른쪽 귀를 베고 자면 당신이 아팠고왼쪽 귀를 베고 자면 새벽달이 아팠다 담요처럼 얇게 펴지는 어둠을추운 마음에 덮을 수는 없어서모로 누우면 뒤척거리는 밤이 되었다펴진 귀는 편해진 귀가 되어도당신의 모습은 아픈 귀에만 모였다 밤을 온몸에 묻히고 죽은 듯이 있어도 12월은 간다해가 바뀐다 해도 빈자리는 여전히 먼 곳이고귀는 아픈 방향을 달고 있도록 태어나제자리로 오래 가야 할 하현은 조금 더 해쓱해졌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24년 가을호---------------------심재휘 / 1963년 강릉 출생.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2024. 12. 17. 이전 1 2 3 4 5 6 7 8 ··· 8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