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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80

야크의 눈물 야크의 눈물 김경성 최초의 사람이 걸어갔던 길 위에 야크 떼가 서 있다 야크의 눈에 들어간 설산이 높다 빙하기의 시간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더러는 뿌리까지 뽑혀서 올라오는 마른 풀을 되새김질하며 따뜻한 젖으로 사람들의 심장을 어루만진다 맨발로 서 있는 설산은 수백 겁 설층으.. 2019. 8. 13.
목기미 해변*에 닻을 내리다 목기미 해변*에 닻을 내리다 / 김경성 끊어진 전선을 목에 걸친 전봇대, 백사장에 발목을 묻고 있다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들이 길 위에 떨어져 있다 떨어져서 굴러다니던 말들은 전봇대와 전봇대를 넘나드는 새들의 몫이다 먼 곳의 소식도 그의 몸을 타고 흘러왔고 추억으로 .. 2019. 8. 13.
바다로 간 목마 바다로 간 목마 김경성 한 떼의 적란운이 머물다 간 뒤 섬이 흔들렸다 몇 번 꺾여서 바닷속으로 들어간 번개는 다시 되돌아 나오지 못했다 그 열기에 바다는 저릿한 붉은색으로 물들고는 한다 비스듬히 닳아버린 신작로 끝에 바다가 걸터앉아 있었다 낡은 편자를 갈아 끼우지 못하고 먼 .. 2019. 8. 13.
섬진강의 봄 섬진강의 봄 김경성 윤슬 꽃 핀 긴 혀를 내밀어서 여자를 감아올렸다 혀를 더 길게 내밀어서 벚나무도 한 번 더 감아올렸다 달이 물었다가 내려놓은 은빛 비늘 물고기들이 강의 등허리에서 자꾸만 튀어 올랐다 강물의 입속에는 수만 가지 혀의 돌기가 있어서 입맛을 다실 때마다 그녀의 .. 2019. 8. 13.
물컹한 화석 물컹한 화석 김경성 달빛에 절인 그녀의 둔부를 할퀴며 미끄러지는 것들이 있다 갯고랑에 박힌 채 심호흡을 한다 벗어놓은 옷자락으로 만든 날개를 헤링본스티치 한다 덧대어 붙였던 구름은 이미 오래전 둔부의 적도 근처에서 사라졌다 엎드려서 숨을 쉴 때마다 들이켜지는 것이 있다 .. 2019. 8. 13.
해인사 장경판 해인사 장경판 김경성 오래된 숲을 들여다 본다 행과 연을 맞추어서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 숲의 중심이 되는 햇빛은 사라지고 오직 그림자와 바람만이 가득한 숲 그림자 가득 머금은 채 제 몸을 훑고 가는 바람의 탯줄을 붙잡고 서 있어야만 하는, 관절 마디마디에 짜디짠 바닷.. 2019. 8. 13.
삼층석탑 삼층석탑 김경성 신륵사 강월헌江月軒 우물천장의 꽃들과 삼층석탑은 여강의 물소리로 시간을 읽는다 소리의 문자로 각인되는 암각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제 속으로 파고들고 강물에 발목을 묻은 너럭바위는 초석이 되어서 묵언 수행 중이다 한떼의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 뒤집으.. 2019. 8. 13.
젖꽃판이 꽃이었다 프라하 구시가지 2011년 2월 젖꽃판이 꽃이었다 / 김경성 1 첨탑은 어느 쪽에서든 빛이 났다. 청동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비둘기 십여 마리씩 떼 지어서 날았다 황금빛 첨탑이 있는 청동지붕에서 산호초처럼 구부러진 나무의 즙을 먹고 사는 붉은 집으로 날아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 2019. 8. 13.
추전역 추전역 김경성 꼬리지느러미 오른편에 앉았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아가미 속으로 산길 꾸러미가 흘러들어 갔다 검은 길은 등지느러미를 따라 흘러가고 물박달나무는 제 몸의 비늘을 벗겨서 속 길을 그렸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연필심이 제 몸의 뼈대가 된 추전역, 이따금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4B연필로 그어놓은 산길 위에 산란하는 물고기 떼, 배지느러미에 말간 알을 가득 안고 바다 쪽으로 흘러갔다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내 생도 저물어간다 *물고기의 옆줄(측선)은 물의 온도, 흐름, 수압, 진동을 감지한다. 계간 『시와산문』2012년, 가을호 2019. 8. 13.
겨울시편 겨울 시편 / 김경성 한겨울 날아드는 철새 떼는 전깃줄부터 팽팽하게 맞춘다 봄부터 가을까지 마음 열고 있는 전깃줄을 오동나무 공명판에 걸어 놓고 바람으로 연주한다 산조가야금 소리 들판을 가로질러갈 때 저수지의 물결마저 일시 정지하여 제 몸 위에 얼음판을 올려놓고 새들의 그.. 2019.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