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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김경성 - 근작시108

무른 시간을 달려서 저녁의 문지방을 넘었다 / 김경성 무른 시간을 달려서 저녁의 문지방을 넘었다 김경성 무릎이 젖어 있다 안개에 너무 오래 넣어둔 탓이다 나비 울음 같은 소리가 당신의 입술을 빠져나온다 허공을 받치고 있던 대숲이 한쪽으로 스러진다 바닷속에 손을 넣으니 한 움큼의 수초가 잡힌다 욱신거리는지 파도가 인다 율포 앞.. 2017. 5. 5.
고인돌 고인돌 김경성 누군가 있었던 자리가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누워본다 별이 쏟아지던 하늘은 금이 가 있고 그 틈으로 내리 꽂히는 빛에 눈이 멀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만 어느 사람이 제 눈을 파내지 못해서 울컥거렸는가 꽃 자리인 듯 움푹 팬 곳에 시위를 떠나지 못한 화살이 .. 2017. 5. 2.
분절음 분절음 / 김경성 와편에 새겨져 있는 물고기 등뼈가 이지러져 있다 아가미를 드나들던 숨도 지느러미와 함께 사라졌다 부레의 힘으로 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는 물고기의 집은 물속이 아니었다 몇 장 남아있는 비늘을 지문처럼 지층 속에 넣어두고 오랫동안 저 자리에 있다 흩어져 있는 .. 2017. 1. 14.
화장암華藏庵 화장암華藏庵 김경성 뱃가죽이 붉은 뱀 한 마리가 길바닥에 뒤집혀 있다, 한 번도 누워본 적 없다는 듯 기다란 몸이 물결처럼 길을 건너가는 사이 뱀의 등뼈가 부서지도록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 길바닥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자국이 아니어도 순간이 빚어낸 참혹한 스침이다 몸을 구부려.. 2016. 10. 16.
[신작시 특집] 늙은 집 外 2편 / 김경성 <신작시 특집> 늙은 집 김경성 슬픔도 오래 묵히면 붉은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가 달팽이관으로부터 시작된 실금이 문쪽으로 흘러가더니 문턱에서 멈추었다 이내 싸르락 소리를 내며 뜨거운 물이 아래층 천장을 타고 흘러갔다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속에서 나.. 2016. 3. 30.
침향 침향 김경성 섬이 서 있다 수백 년 동안 키도 크지 않고 늘 그만큼의 높이로 무엇인가 가득히 묻혀있다 야생의 시간은 늘 그들의 몫이었다 누군가의 빗금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염소떼의 몸을 빠져나온 푸른 잎사귀 바다의 문턱을 넘어서거나 해국 그늘 아래에서 검은 눈으로 섬 바깥.. 2016. 3. 30.
간이역 간이역 김경성 철길에 귀를 열고 기차의 발걸음 소리를 받아적는 맨드라미에 얼굴을 묻었다 찌르르르 끼르르륵 맨드라미의 겹쳐진 꽃 주름 사이에서 기적 소리가 들렸지만 날이 저물도록 기차는 오지 않았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시계추 둥둥둥 소리를 내며 천장까지 닿았다 멈춰있.. 2016. 3. 30.
바람의 통증 2009년 바람의 통증 김경성 폐염전에서 찢어진 바람의 갈기를 본 적 있다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지거나 말갈기처럼 너덜거리는 바람이 제 속을 반쯤 파먹어서 삐그덕거리는 창고의 귀를 스치고 갔다 입맛 다시는 염전의 바닥은 저물어가는 태양의 잔설로 눈부셨다 붉은 함초 더듬는 바람.. 2014. 7. 12.
바다로 간 목마 바다로 간 목마 김경성 한 떼의 적란운이 머물다 갔다, 섬이 흔들렸다 몇 번 꺾여서 바닷속으로 들어간 번개는 다시 되돌아 나오지 못했다 그 열기에 바다는 저릿한 붉은색으로 물들고는 한다 비스듬히 닳아버린 신작로 끝에 바다가 걸터앉아 있었다 낡은 편자를 갈아 끼우지 못하고 먼 .. 2014. 2. 4.
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 외 1편 / 김경성 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 외 1편 / 김경성 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 김경성 깊이 들이마셨던 숨 내려놓았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시간을 잊고 기다려야 했다 땅 깊숙이 얼굴을 묻고 지상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는 말들을 하나하나 제 속에 들였다 물이 흘러가던 뿌리를 거두고 거꾸.. 2013.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