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김경성 - 근작시

물고기 옆에 금잔화 꽃다발이 있다 / 김경성

by 丹野 2022. 10. 24.

 

 

 

물고기 옆에 금잔화 꽃다발이 있다 / 김경성

 

  

꽃이 먼저였는지 물고기가 먼저였는지

입술을 오므렸다가 펴는 바다만이 알고 있을 뿐

멀리 떠난 사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말라가는 물고기 비늘만이 시간을 말해준다

  

손을 놓쳐버린 꽃들은 서서히 꽃 즙을 말리고 

몸을 뒤척이며 제 비늘을 세우는

물고기의 검은 눈 속으로 파고든 햇빛마저 길을 잃었다

  

꽃을 놓은 손은 어디쯤 멈춰 서서

제 살 속의 아픈 말들을 삼키고 있을까

  

이미 숨을 놓아버린 것들이 내는 빛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어떤 슬픔을 머금고 있다

  

태엽을 많이 감아도 

시곗바늘을 되돌려 놓아도 그만큼의 속도로 가는 

회중시계를 꺼내놓는다 

  

마른 꽃은 더 이상 마르지 않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물고기 등을 밀고 오는 파도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노트]

 

  한낮처럼 밝은 새벽 다섯 시, 아침 해는 벌써 수평선을 짚고 뛰어올라 닿을 수 없을 만큼 솟아올랐다. 인도차이나 반도 바다 위에 떠있는 형형색색의 목선은 물고기 눈과 머리를 그려놓아 마치 영화 속 풍경처럼 꿈을 꾸는 듯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오래된 시간의 상처가 많아 보인다. 앞에 보이는 모습만 보고는 깊은 내면의 일들을 한 눈금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래된 폐선을 해체하여 페인트를 칠하고 붉은 녹을 벗겨내는 어부의 손은 사용하지 못한 말들을 사전 속에서 찾아내는 듯 심오하고, 흐르는 땀방울은 말줄임표를 찍고 있다.

 

  만선의 깃발을 쌓아놓은 썰물의 바닷가, 그물을 펼쳐 든 사람들이 희고 작은 물고기를 잡아서 파란 통에 가득히 담아 들고 바다를 빠져나갔다. 나도 바다의 말이 들어있는 뿔소라 껍데기를 주웠다. 

 

  지난밤 만조의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백사장에 버려져있는 금잔화 꽃다발, 맹세처럼 단단하게 묶은 리본은 물을 먹어 더 단단히 꽃대를 움켜쥐고 있다. 저 흩어지지 않는 마음처럼 꽃다발을 놓쳐버린 사람들도 단단해졌기를 바라며, 이별의 슬픔이라는 금잔화 꽃말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했고, 누군가에게는 상처였을 금잔화 꽃다발 근처에 죽은 물고기 가 말라가고 있다. 지느러미를 조금만 더 흔들었다면 썰물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았을 텐데 호기심이었을까? 꽃향기에 취해서일까?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와 내던져진 금잔화 꽃다발이 보이는 방파제에 늙은 개가 앉아있다.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다 안다고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늙은 개의 눈에서도 바다가 출렁거렸다.

 

  푸르메리아 꽃이 뚝뚝 떨어지는 바닷가였다.

  파파야 꽃이 피고 망고나무 그늘이 깊은 날이었다. 우리의 생도 이만 같아서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나날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고요하게 말을 걸어오는 아주 작은 것들의 속삭임을 들었다.

 

  당신도 나도 맨얼굴로 세상에 나갈 수 없는 나날들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그 바닷가 부드러운 바람과 긴 바람을 불러오는 종려나무와 너무도 진해서 핏빛 같은 노을과 해 지고 난 후 그 푸른 저녁 하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 두레문학 202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