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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김경성 - 근작시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 / 김경성

by 丹野 2022. 6. 19.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 김경성

 

 

몽상가의 집

김경성

 

소리로 어둠을 읽는 두더지는

눈의 꽃술로 빛을 들이며 소리를 보는 귀를 가졌다

꿈꾸는 지상의 날들을 모두 땅 속에 묻어두고

혼자만의 방을 만들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 있어 귀를 열면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검은 소리 , 그때 두더지는 

미로를 만들며 빠르게 멀어진다

 

몽상가의 집은 두더지의 방을 지나 늪에 있다

바람이 잠잠한 날에 더 잘 보이는

물속의 집과 나무들

물옥잠은 공작 깃털 같은 꽃을 피워 올려 섬을 만들고

새들도 구름을 밀고 다닌다

 

누구라도 집으로 가는 길을 걸으면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와 하나가 되어

물의 내밀한 속에 들어가게 된다

 

멀리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가까이 가면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서 아슴해진다

 

당신의 이름을 적어 대문 앞에 걸어두는 날이면

두더지는 미농지를 펼쳐놓고 앞다리를 저어서 

길 밖으로 나가는 길을 그리고

작은 것들의 씨앗도 바람을 타고 와서 꽃눈을 뜬다

 

그때쯤 몽상가의 집에서도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 물꽃들이

소리도 없이 피어난다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 / 김경성

 

  이슬비 내리는 아침 안개 자욱한 자라섬에 몸을 부렸다.

더할 것도 없이 한꺼번에 풀어놓은 시간이 안개에 휩싸여 느리게 흘러갔다. 앞서 걸어가는사람들은 뒷모습도 남기지 않고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이따금 새들이 안개를 헤치고 강 건너 마을로 날아갔다.

  안개의 신발을 신은 나는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걷다가 나도 모르게 저기 저기 두더지가 지나간다고 기억 속의 어린 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길 옆으로 흙이 들썩이더니 마치 뱀이지나가는 것처럼 빠르게  땅속에 기다린 길을 만들며 두더지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떤 기억은 몸과 마음에 끝까지 살아 남아있는 것이어서 순식간에 어릴 적 봤던 두더지의 길을 알아챘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가보니 금세 또 저만치 가고 있다. 언덕 위에 키 큰 나무 옆에 있는 작은 나무집에 가 닿을 때에도 아름다웠지만 물에 비친 풍경이 일렁일 때 더 깊게 와닿았다. 

 

보이지 않으나 살아서 수없이 많은 길을 내며

소리로 어둠을 읽는 두더지는

눈의 꽃술로 빛을 들이며 소리를 보는 귀를 가졌다

꿈꾸는 지상의 날들을 모두 땅 속에 묻어두고

혼자만의 방을 만들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몽상가의 집은 두더지의 방을 지나 늪에 있다

바람이 잠잠한 날에 더 잘 보이는

물속의 집과 나무들

물옥잠은 공작 깃털 같은 꽃을 피워 올려 섬을 만들고

새들도 구름을 밀고 다닌다

 

   어딘가 좁은 틈이나  무언가에 서로 기대어서 조금 보이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풍경은 많은 생각이 일게 한다. 때로는 꿈속 풍경처럼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일기도 하지만, 우리의 생도 저만 같아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다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보일 듯 말 듯, 알 듯 모를 듯할 때가 더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리고 난 후의 공허함을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비 오는 아침 물속에 비친 몽환의 집으로 들어가 한나절을  보냈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색을 덧칠하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잃어버린 내 안의 나를 불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생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내가 그토록 꿈꾸었던 세상이 바로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 물꽃들이

소리도 없이 피어난다

작은 것들의 씨앗도 바람을 타고 와서 꽃눈을 뜬다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내게 아직 오지 않았다.

내 안에서도 꽃들이 무량하게 피어나기를

부디!

 

 

 - 두레문학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