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주모 없는 주막을 쓸쓸히 지키는 늙은 회화나무

by 丹野 2011. 9. 26.

[나무를 찾아서] 주모 없는 주막을 쓸쓸히 지키는 늙은 회화나무

   이 땅의 마지막 주막으로 일컬어지는 경북 예천 삼강주막을 품고 서 있는 늙은 회화나무.

   [2011. 9. 26]

   소슬바람 불어오고, 하늘 푸르러서 '주모 없는 주막'을 다녀왔습니다. 250살 쯤 된 훌륭한 회화나무가 지켜 온 예쁜 주막이지요. 주모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던 여인은 지난 2005년 시월 초하루에 여든아홉의 나이로 이 땅을 떠났습니다. 주모 떠난 이 유정(有情)한 주막은 경북 예천 삼강리 주막입니다. 이 땅의 마지막 주막이라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주모가 떠난 뒤에 경상북도에서 민속문화재 재134호로 지정한 곳이기도 하지요.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도 몇 차례 찾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삼강주막이 지금만큼 알려지지 않아서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해 떨어질 즈음에 모여서 주모 할머니가 내놓는 막걸리와 몇 가지 음식으로 하루 노동의 피로를 푸는 마을 쉼터에 불과했습니다. 음식이라고 했지만, 기껏해야 라면과 김치가 전부였던 건 이 주막의 규모와 유정한 멋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주모가 떠나기 전, 슬레이트 지붕 위로 가을 햇살을 받은 삼강주막의 옛 풍경.

   주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모 할머니 생각도 있었지만, 옛 주막을 그보다 더 옛날의 모습으로 복원한다는 경북도청의 계획이 그다지 달갑지 않아서였습니다. 삼강리는 원래 강둑이 쌓이기 전에 나루터였습니다. 주막은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는 소금배 상인들을 위한 쉼터이였지요. 한때에는 삼강주막 외에도 몇 개의 주막이 더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1백 년 전 쯤의 이야기입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주막도 함께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초가 지붕의 오두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새마을운동의 광풍이 몰아칠 때에 초가를 벗겨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올렸지요. 제가 아는 삼강주막은 슬레이트 지붕의 남루한 오두막입니다. 옛 모습으로 복원한다는 걸 논리적으로야 싫어할 까닭이야 찾을 수 없지만, 제 마음에 남은 삼강주막의 이미지를 고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말끔하게 새 단장한 삼강주막과 주막 앞에 새로 조성한 나루터 저자거리.

   제법 근사하게 탈바꿈한 건 주막 뿐이 아닙니다. 주막 주변의 환경이 몰라보게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삼강주막 주변에는 빈터와 논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갈아엎고 엣 나루터 분위기를 재현한 저자거리를 조성했습니다. 꽤 괜찮은 관광지가 된 거죠. 주차장도 널찍하게 조성했고, 심지어 진입로까지 편안하게 바뀌었습니다. 노을 지는 저녁 무렵 삼강주막 앞의 저자거리에는 적지않은 관광객들이 모여 권커니자커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주인이던 마을 사람들은 새로 지은 주막에도 저자거리에도 없었습니다. 마을 노인들은 주막이 훤히 내다보이는 강둑 위에 놓은 평상에 모여 앉아서 안주 없는 깡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발길은 마을 노인들에게 이끌렸습니다. 노인들은 우리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으니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보인 건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변 풍경이 모두 변했어도 여전히 푸른 이끼를 얹고 변함없이 서 있는 250살 된 삼강주막 회화나무.

   그 중에 여든을 좀 넘긴 정강섭 노인은 돌아가신 주모 유옥연 할머니와도 친밀하게 지냈던 분입니다. 그 분은 제가 나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삼강주막에 오면 먼저 주막 뒤의 커다란 회화나무에 말을 걸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무가 대답을 하느냐는 제 질문에 정 노인은 나무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나뭇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하는 법이라며 두 팔을 들어 흔들었습니다.

   정 노인이 나무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낸 건 아마도 삼강주막의 옛 모습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게 바로 한 그루의 회화나무인 까닭이지 싶었습니다. 주모의 술잔을 받으며 오래 살아온 마을 노인에게 가장 정겹게 다가서는 건 아무래도 나무 한 그루 뿐이지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건강이 허락지 않아 요즘은 농사 일을 놓고 한가해진 정 노인은 매일 아침마다 이곳 강둑에 나와서 나무와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해 질 무렵에 잠 자러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주모 떠난 뒤에야 비로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고, 새 단장을 마친 삼강주막.

   아마 나무가 없었다면 제게도 삼강리 주막의 모습은 잘 꾸민 하나의 민속촌 류의 관광지 정도로만 여겨졌을 겁니다. 대개의 영화촬영지에서 느끼는 아쉬움과 같은 느낌이었겠지요. 하지만 이곳에는 삼강주막의 역사와 내력을 오랫동안 잘 지켜온 한 그루의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주막이 세워진 것보다 150년 전에 이 자리에서 자라난 나무입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47) - 예천 삼강주막 회화나무]

   나루터 주막의 왁자한 저자거리의 분위기에는 안 어울릴 듯한 회화나무입니다. 회화나무는 대개 선비들이 좋아하는 나무여서 '선비수' '학자수' 정도로 불리니까요. 그래도 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주막을 거쳐산 사람살이의 속내를 죄다 살펴봤을 겁니다. 주모가 살아 계시던 때에는 바로 이 나무 아래가 마을 노인들의 술 자리였습니다. 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 자리에서 주모 할머니가 내놓는 음식을 나눠 먹었던 겁니다.

   깨끗이 정돈한 주막 부근에는 예전에 주모의 술상을 놓고 하루 노동의 피로를 풀던 평상은 사라졌습니다.

   잘 생긴 회화나무 그늘은 지금 깨끗이 정돈되었고, 그 곁에는 주막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자동차가 멀쩡한 주차장을 놔두고 들어와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느 관광지에서라도 볼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의 분별 없는 행동이지 싶습니다. 그 뿐 아니라 새로 단장한 주막의 흙담에는 누구누구가 다녀갔다는 낙서들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그냥 굵은 펜으로 적은 낙서도 있지만, 아예 흙을 파내어 깊이 새긴 낙서까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좋다고만 하던 정 노인도 이 대목에서는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번을 세워서, 매일 저녁에 주막을 지키며 밤을 새우지만, 하루 종일 관광객들을 감시할 수 없는 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나그네에게 속내를 모두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대책없이 쌓이는 낙서와 무분별한 행동들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삼강주막 툇마루에서 내다보이는 회화나무의 넓고 굳은 줄기.

   백 년 전의 나루터를 재현한 삼강리 나루터와 삼강주막. 그곳에는 그 동안 주모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쌓았던 세월의 앙금을 그렇게 모두 벗겨내고 바깥 사람들의 쉼터로 탈바꿈하는 중입니다. 백 년 전의 세월의 옷을 입느라 십여 년 전의 세월이 뭉텅뭉텅 벗겨진 게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한 그루의 오래 된 회화나무가 넉넉한 그늘로 지켜주는 게 다행입니다. 세월 더 지나고, 사람살이에 지친 어느 저녁 무렵, 이 회화나무가 있는 삼강주막을 다시 찾아가게 되겠지요.

   시와 함께 읽는 우리 식물 이야기로 오늘의 나무 편지 마무리하겠습니다. 삼강주막의 회화나무처럼 우리 시대의 남루를 기억하는 이팝나무 이야기와 천년 수도승처럼 꼿꼿하되 풍성하게 그늘 드리우고 서있는 느티나무, 벼락을 맞고 한 순간에 삶을 놓은 곰솔, 가을에 꽃 피우는 갈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긴 투병 끝에 생을 마친 김태정 시인의 시 '물푸레나무'도 이야기했습니다.

   신문 칼럼 [시가 있는 아침]에 김요일 시인의 시 '롱 테이크'와 함께 소개한 벼락맞은 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