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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가을 하늘 아래 사람과 더불어 사는 느티나무

by 丹野 2011. 10. 12.

[나무를 찾아서] 가을 하늘 아래 사람과 더불어 사는 느티나무

   "하늘을 나는 새가 나뭇잎 위에 가을 빛을 떨구고 파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2011. 10. 10]

   "사람들 사이에 가을이 깃들었다. 개똥지빠귀 한 쌍이 초록의 나뭇잎 위에 가을 빛을 떨구고 파란 하늘로 날아 오른다. 나무는 언제나 사람보다 한 걸음 먼저 계절을 맞이한다. 생명의 노래를 불러제끼던 봄도, 벌 서듯 뙤약볕을 견뎌낸 여름도 무사히 보냈다. 꽃도 잎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가을이다. 깊어가는 가을 숲에 안도의 적막감이 감돈다."

   ['시가 있는 아침' - 이경임, '봄 여름 가을 겨울']

   찬 바람을 살갗으로 느낄 수 있던 며칠 전 이경임 시인의 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한 수 거든 글입니다. 가을을 불러오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쓴 그 글은 "소슬바람 일어나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는 말 없이 겨울을 준비한다. 나무 따라 사람들 사이에도 가을이 깊숙이 스민다. 나무처럼 겨울을 생각해야 할 때다."로 맺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곁에도 가을이 스쳐 지납니다.

   봉화 거촌리 황전마을 동구밖 도암정 풍경.

   가을 깊어지면서 찾아본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있습니다. 경북 봉화읍 거촌리 황전마을이라는 한적한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입니다. 나무 곁에는 도암정이라는 아담하고 예쁜 정자가 함께 있어서, 저는 그냥 '도암정 느티나무'라고 부르지요. 오래 전에 냈던 제 책 '옛집의 향기, 나무'에서도 소개했던 나무로, 그닥 대단할 것 없는 나무이지만, 저는 여느 큰 나무 못지않게 좋아하는 나무입니다.

   10년 쯤 전에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건 우연이었습니다. 지나는 길에 눈에 들어와 잠시 머물고자 했던 나무였습니다. 아마도 봉화에서 울진으로 넘어가던 어느 여름 날 늦은 오후였을 겁니다. 길가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그 곁의 작은 정자, 그리고 정자 앞의 연못이 이뤄내는 풍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도암정 들어서는 자그마한 쪽문.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지날까 하고 나무 곁으로 찾아들었는데, 거기엔 뜻밖에도 흥미로운 사람살이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때 도암정 안에는 마을 어른들이 앉거나 누워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바깥의 느티나무 그늘에도 마을 사람 여럿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정자 안의 누마루에도 여유가 넉넉해 보였는데, 느티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나와 앉은 게 조금은 의아했지요.

   느티나무 그늘에 들어와 앉은 마흔 쯤 돼 보이는 마을 사내에게 "왜 정자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느티나무 그늘이 정자보다 더 시원하고 좋아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도암정에는 남다른 사용법이 있지 싶었습니다. 정자에서 나와 느티나무 사내에게 다시 궁금증을 털어놓았습니다.

   도암정 지붕으로 나뭇가지를 넉넉하게 펼쳐낸 도암정 느티나무.

   짐작대로 도암정에는 이 마을 사람들의 사용법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을 안에 모시고, 젊은 사람들은 바깥에 나와 앉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럴 만도 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선조 가운데에는 조선시대의 문인 김종걸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당시 '호랑이도 감동시킨 효성'으로 팔도에 이름을 널리 알린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은 여전히 '경상북도 지정 효 시범 마을'입니다. 정자 사용법에서부터 효도 정신을 실천하는 곳이라는 이야기지요.

   사실 도암정 느티나무는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느티나무입니다. 굳이 특별하다 하면, 나무 곁으로 집채 만한 세 개의 바위가 늘어서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니,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정자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제 생각뿐이었을 겁니다. 나무가 무슨 예를 갖추겠어요. 그저 나무를 둘러싼 이 마을 문화가 흥미로워 든 느낌이었겠지요.

   집채 만한 바윗돌을 이고 선 나무 뿌리 위로 둘로 나뉘며 올라간 도암정 느티나무 줄기.

   여름 보내면서 그 나무가 떠올라, 다시 봉화 도암정 느티나무를 찾았습니다. 나무들이 낙엽하는 가을 탓인지, 나무는 이전에 비해 약해 보였습니다. 바람 선선해진 이유로 느티나무 그늘에도 도암정에도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자 앞 연못의 연꽃도 이미 꽃 떨군 지 오래됐고요. 정자 안팎과 느티나무 주위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느티나무에 기대어 있는 바로 옆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신 건 이 집의 예천댁 아주머니였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48) - 봉화 도암정 느티나무]

   예나 지금이나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효(孝)입니다. 예천댁 아주머니는 부산에서 직장에 다니다가 최근 고향 마을에 돌아와 과수원을 가꾸는 맏아들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셨지요. 마흔을 훨씬 넘은 나이의 예천댁 아드님은 부지런할 뿐 아니라, 마을 어른 모시는 데에서도 최고 효자에 속한다는 게 아주머니의 자랑이었습니다. 그 아드님 뿐 아니라, 이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지요.

   주로 마을 어른들이 이용하는 도암정 내부.

   지붕 가까이로 가지를 넓게 펼친 느티나무를 바라보면서 예천댁 아주머니는 굽은 허리를 잠시 펴며 나무가 늙어서 예전만 못 한 걸 아쉬워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몇해 전에 비해 부쩍 수척해 진 게 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까요. 가을 탓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무가 이태 전에 바람을 못 이기고, 몇 개의 큰 가지가 부러졌다는 겁니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속이 텅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도암정 느티나무는 훌륭한 나무입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정신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버팀목으로 살아간다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이번 칼럼의 첫 머리에 '논어'의 한 귀절 "이인위미(里仁爲美) 택불처인(擇不處仁), 언득지(焉得知)"라는 말을 끼워넣은 건 그래서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아는 한 나무들은 분명히 그가 살아가는 마을의 문화 혹은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도암정 앞의 연못에 무성하게 올라온 연꽃 풍경.

   지난 주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뇌졸중으로 대화가 쉽지 않은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올 수상의 영예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지만, 우리 글로 번역된 시집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보다 자연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긴 분입니다. 그 분의 시 가운데 한 편을 오늘 아침의 '시가 있는 아침'에 소개했습니다. 번역서의 번역을 고쳐서 소개했습니다. 음미해 보시지요.

   ['시가 있는 아침'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나무와 하늘']

   지금 이 곳은 아침부터 안개가 뿌옇게 깔렸습니다. 한낮인데도, 안개 걷히지 않고 자욱합니다. 이 가을을 어찌 보내시는가요. 제가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가에 서 있는 산수유나무엔 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맺혔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나시는 산길엔 쑥부쟁이도 피어났겠지요. 모두에게 풍요로운 가을 되시기 바라며 '시가 있는 아침'의 글, 배달합니다.

   한해동안 맺은 열매를 갈무리해야 하는 계절, 모두 평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