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옻칠 백제 갑옷 출현에 학계 '흥분'>
연합뉴스 | 김태식 | 입력 2011.10.13 16:24 |
"문헌에만 보이는 백제 전설적 갑옷 '명광개'"
(공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3일 공산성은 온종일 북적거렸다. 전날 저녁 문화재청을 통해 공개된 백제 갑옷 출토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 데다 마침 이날 발굴조사단인 공주대박물관(관장 이남석)이 공산성 안쪽 성안마을 발굴현장을 일반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충남대 사학과 김수태 교수는 "옻칠을 한 가죽 갑옷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실물이 궁금해 달려왔다"면서 "새로운 자료의 출현으로 백제사 연구는 아연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발굴현장인 까닭에 고고학 연구자도 많았다.
이들은 다른 무엇보다 어제 갓 쓴 것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1천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의 붉은색 글자들에 감탄했다.
문제의 백제 갑옷은 성안마을에 대한 올해 제4차 발굴조사 결과 저수시설을 막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바닥에 인접한 층위에서 출토됐다. 갑옷 한 벌이 온전하게 발견됐다기보다는 그 한 벌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비늘 조각이 고스란히, 그리고 가득히 발견된 것이다. 이들 비늘에는 갑옷 몸체에 실로 매달고자 뚫었음이 분명한 바늘구멍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더욱 놀랍게도 일부 갑옷 비늘에는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행 정관 19년 4월21일)' '王武監(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銀○(이○은○)' 등으로 읽히는 붉은색 글씨가 유려한 서체로 적혀 있으며, 더구나 지금도 육안으로 생생하게 알아볼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는 점이 경이로움을 주었다.(○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
현장 발굴 책임자인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갑옷 비늘을 처음 확인한 것은 일요일인 지난 9일이고, 그것이 무리를 지어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그저께(11일)였다"면서 "대나무 칼로 조심스럽게 비늘에 묻은 뻘흙을 걷어내다가 갑자기 붉은 흔적이 드러나 처음에는 (대나무) 칼로 내가 잘못 긁어낸 상처로 알았다"고 돌아봤다.
갑옷 비늘 조각이 얼마나 될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 상당 부분이 노출되기는 했지만 현재의 노출 층위 밑에도 얼마든 다른 조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남석 박물관장은 "(비늘 조각이) 아마 1천 개는 되지 않을까 한다"면서 "이들 조각을 세심히 기록하고 그 출토 상황을 점검하면 이 갑옷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자가 확인된 비늘 조각은 6점 안팎이지만, 현장 상황을 보면 더 많은 문자가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됐다.
이들 문자 자료 중에서도 서기 645년에 해당하는 '정관 19년'이라는 비늘 조각에 대해 이현숙 학예사는 "정밀한 조사와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오른쪽 가슴 위 정도가 아닌가 한다"면서 "이렇게 되면 남한테 잘 보이는 데다가 글자를 새겨넣은 셈이 된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이들 갑옷 비늘이 가죽에다가 옻칠을 여러 번 입힌 형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죽 부분은 없어지고 지금 남은 부분은 두터운 옻층이라고 이 학예사는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온통 검은색인 비늘 조각들은 유리질 같은 빛을 반사하기도 했다.
다만 옻칠을 몇 번 했으며, 옻 외에 어떤 재료가 사용되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추후 엄밀한 보존과학적 측면에서의 분석이 있어야 한다고 현장을 참관한 보존과학 전공 유혜선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말했다.
이훈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장은 "이 갑옷은 문헌에만 보이는 백제의 전설적인 갑옷 '명광개'(明光鎧)일수밖에 없다"면서 "이 갑옷이 백제 자체 제작일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라도 당나라 군인이 버리고 간 것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한편, 많은 갑옷 비늘이 무더기로 출토되는 바람에 이들 유물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존처리해야 하는지도 문제로 떠올랐다.
이 관장은 "고고학적 정보를 확보한 다음 그것을 어디에서 처리할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 전문가들을 현장에 파견해 이와 관련한 대처 방안을 조만간 마련키로 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
공주 공산성 유적 발굴… 당시 정황 풀 중요한 자료
백제의 어느 장수가 입었던 갑옷일까? 왜 주인의 유골은 없이 갑옷만 웅덩이 속에서 발견됐을까?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재위 641~660) 때 백제 장수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죽 갑옷이 14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백제가 멸망하기 15년 전인 645년 연대가 또렷이 적힌 데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가죽 갑옷으로 밝혀져 백제 멸망기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 ▲ 공주 공산성(사적 12호)에서 수습한 백제의 갑옷 조각. 貞觀十九年(정관 19년), 즉 645년(백제 의자왕 5년)이라는 글자가 붉은색으로 또렷이 적혀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공주대박물관(관장 이남석)은 충남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성안마을 유적에 대한 4차 발굴의 마무리 조사 과정에서 서기 645년을 가리키는 '貞觀十九年(정관19년)'이라는 글자가 적힌 찰갑(비늘 모양 갑옷) 1령을 수습했다고 12일 밝혔다. 갑옷은 저수지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출토됐으며, 모두 1000여 조각이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행정관십구년사월이십일일)' '王武監(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銀○' 등 20여자가 붉은색(朱漆)으로 또렷이 적혀 있다. (○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
조사단은 특히 이 중에서도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이라는 기록을 통해 645년, 당 태종의 연호인 정관 19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645년은 백제 의자왕 재위 5년째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해 안시성 전투를 벌였으며 이후로 삼국과 당의 전투와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남석 관장은 "옻칠한 갑옷은 당시 왕에 준하는 권력을 누린 장수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 백제 무왕 27년(626)에 백제 갑옷으로 기록된 '명광개(明光鎧)'로 보인다"고 했다.
| ||
|
|
1400년 전 백제 갑옷이 나왔다 | ||||||||||||||||||||||||||||||
의자왕 5년에 제작된 옻칠 가죽갑옷 | ||||||||||||||||||||||||||||||
| ||||||||||||||||||||||||||||||
‘645년 4월 21일’이라고 제작시기가 표시된 갑옷이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공주대학교 박물관(관장 이남석)은 공산성 성안마을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중 서기645년(의자왕 5년)을 의미하는 ‘貞觀 十九年 四月 二十一日(정관 십구년 사월 이십일일)’라고 적힌 가죽갑옷을 백제시대 문화층 저습지에서 발굴하고 10월 12일 이를 공개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
이 같이 명문(銘文)이 새겨진 고대 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무령왕릉의 지석(국보 163호)과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mm 정도의 두께로 옻칠이 된 이 갑옷은 가죽갑옷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당시 옻칠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갑옷에 쓰인 명문은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외에 ‘王武監(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이)○銀(은)○’ 등이 붉은색 글씨로 쓰여 있는데 ‘왕무감’이라는 글자를 통해 갑옷의 소유자가 왕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발굴조사의 책임자인 이남석 관장은 “이처럼 고급스럽고 화려한 옻칠 가죽갑옷은 적어도 왕에 버금가는 신분의 소유자가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가치를 평가했다. 그는 또 “갑옷의 형태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양호하고 화살촉 등도 함께 발견돼 백제 멸망기를 연구하는데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아라고 말했다. 공주대학교 박물관은 13일 비늘처럼 펼쳐져 있는 이 유물을 형태 그대로 박물관으로 옮겨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과학과(학과장 조남철)와 함께 복원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공주대학교 박물관은 3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성안마을에서 처음으로 백제시대 문화층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데 당나라와 신라의 것으로 보이는 화살촉과 불에 탄 건물의 흔적 등 660년 백제 멸망 때의 정황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성안마을 유적지는 백제가 공주에 도읍하던 시기의 왕궁관련 시설로 추정되는 곳으로 공산성(사적 제12호) 내 공북루 안쪽에 있는 약 3만3,000㎡(1만평)의 평지인데 2000년 이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곳이다.
이 유적지에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직후인 475년 즈음에 만들었던 건물지와 그로부터 약 50여년 뒤에 지역을 정지한 후 시설한 기와를 사용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660년 백제의 멸망과 함께 불탄 흔적도 남아 있었고 불탄 흔적 속에는 당시의 전쟁과정에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당나라와 신라의 쇠 화살촉도 있으며 신라 사람들이 지은 기와를 사용하지 않은 형태의 집들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이곳은 지장물로 2000년 이후까지는 조사가 미루어졌고 본격 조사 이후 올해 처음으로 백제시대의 층까지 조사를 확대하여 지하 5~6m의 깊이에서 웅진시대 백제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굴한 유적은 전체 약 30%정도에 불과한데 도와 시는 연차적 발굴을 진행할 것으로 계획하고 있어 백제유적의 보다 구체적 면모가 추후에 확인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그 결과에 따라서는 유적의 정비나 복원문제가 중요하게 검토될 것이다. 이곳 일대에서는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진행된 백제문화제 기간 중에 ‘1500년 전 백제와의 만남’이라는 특별전시와 백제마을 체험행사가 열려 관광객들로부터 호응을 받기도 했다. |
'이탈한 자가 문득 > 풍경 너머의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속의 선율 - 윌리엄 터너의 '난파선' (0) | 2011.10.31 |
---|---|
깊어가는 가을, 찬 비 맞고 서 있을 탱자나무를 그리며 (0) | 2011.10.25 |
가을 하늘 아래 사람과 더불어 사는 느티나무 (0) | 2011.10.12 |
주모 없는 주막을 쓸쓸히 지키는 늙은 회화나무 (0) | 2011.09.26 |
'살아있는 천년의 지혜' 대장경축전 개막 (0) | 2011.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