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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김경성 - 근작시108

목이긴굴뚝새 / 김경성 목이긴굴뚝새 김경성 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와서 어떤 징표를 확인하려는 듯 머물다 간다 담쟁이도 긴 몸 위에 잎을 겹쳐서 어딘가에 닿을 것만 같은 지도를 끊임없이 그려나간다 저 속에는 다 가보지 못한 길이 숨겨져 있다 지붕 위의 목이 긴 새 한 마리 저릿한 마음결 무늬와 뜨거움 다 어디로 보내버리고 긴 부리를 열어서 들리지 않는 노래만 부르고 있는 것일까 날고 싶어 지붕에 올라갔지만 평생토록 날지 못하는 저, 굴뚝을 목이긴굴뚝새라고 부르면 안 되나 먼 하늘까지 높이높이 날아다니는 그런 날이 온다면 목까지 차오른 기쁨이 넘쳐 눈물 나겠다 빈집 속에서 소멸해 가는 것들이 내는 저음의 소리를 물고 목이긴굴뚝새가 날아오른다 - 2021년 봄호 2021. 3. 7.
녹슨 거울을 들고 있다 / 김경성 녹슨 거울을 들고 있다 김경성 얼굴이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은 청록의 시간이라는 것 한차례 뜨거움이 지나가고 마지막 숨을 풀어내는 연기의 끝까지 가보면 그곳에는 청록의 시간을 닦아낼 수 있는 한 줌의 재가 있다 청록을 지우고 빛이 나면 그 시간이 되돌아올 수 있을까 녹슨 거울이 제 안에 물고 있는 것은 제 속에서 거닐었던 한 사람의 생이라고 먼 시간을 건너 온 슬픔이 나를 비추고 있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0년 9-10월호 2020. 12. 28.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 / 김경성 cafe.daum.net/poemory/JW6F/10955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 / 김경성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 김경성어떤 슬픔은,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이하마처럼 삼킨다숲에 들어 한 그루 나무로 살았던 그가잎을 다 내려놓고몸에 새겨두었던 시간을 쪽빛 하늘에 걸어 두었을 cafe.daum.net 2020. 10. 24.
파미르에서 쓰는 편지 / 김경성 파미르에서 쓰는 편지 / 김경성 세상의 별들은 모두 파미르 고원에서 돋아난다고 붉은 뺨을 가진 여인이 말해 주었습니다 염소젖과 마른 빵으로 아침을 열었습니다 돌산은 마을 가까이 있고 그 너머로 높은 설산이 보입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는 아침입니다 나귀 옆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나무 우듬지에 걸쳐있고 풀을 뜯는 나귀의 등에는 짐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백양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 왜 그렇게 먼길을 떠나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멀리 있고 설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고원에 부는 바람을 타고 나귀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귀가 노인을 이끄는지 노인이 나귀를 따라 가는지 두 그림자가 하나인 듯 천천히 풍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 계간 2018년 여름호 사진출처 / blog.daum.net/v.. 2020. 10. 20.
돌 속에서 잠든 새 / 김경성 돌 속에서 잠든 새 김경성 오래 생각하는 것들은 새가 되었다 어떤 새는 돌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솟대가 되었다 하늘과 지상을 잇는 빛의 길을 내어주는 것이 그의 몫, 깃털이 빛을 받아 사람들의 머리 위에 무지갯빛을 내려주어도 염원처럼 생각은 쉬이 접히지 않고 무엇이 되고 싶다고 한마디 말을 해보지만 간절한 말은 너무 깊이 있어서 가장 늦게 터져 나왔다 그 말은 끝내 번져가지 못하고 그저 맴돌기만 할 뿐 너무 오래 생각을 하거나 생각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드는 일은 돌 속에서 잠든 새를 꺼내는 일처럼 어렵다 정(釘)으로 수없이 내리쳐서 오래 잠겨있던 생각을 걷어내면 새는 그때 잠에서 깨어난다 돌 속에서 가장 먼저 나온 부리가 어떤 울음으로 말을 한다 그 말을 잘 접어서 하늘과 잇닿는 빗금 위에 올려놓으면 .. 2020. 10. 19.
묻힌 얼굴 / 김경성 묻힌 얼굴 / 김경성 무릎에 얼굴을 묻고 생각에 잠기다 보면 눈물이 날 적 있다, 어떤 말로도 위안이 되지 않는 그런 사소한 슬픔까지도 무릎이 다 받아 내준다 어떤 슬픔이 있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흙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을까 새들은 날고 거북이는 걸어가고 아기고래는 먼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고 나무는 그 자리에서 그늘을 넓혀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었다가 지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을 그가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없었던 얼굴과 몸을 돌 속에서 꺼내 준 사람은 아직도 손에서 정과 망치를 놓지 못하고 있을까 경주 남산자락 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천백 년 만에 고개 들어 세상을 바라보는 통일신라시대 불두 (佛頭 ) 십여 미터 거리에 몸을 두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 2020. 8. 17.
물고기 몸에 물이 차오를 때 / 김경성 cafe.daum.net/poemory/JW6F/9941?searchView=Y 물고기 몸에 물이 차오를 때 / 김경성 물고기 몸에 물이 차오를 때 김경성 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람의 힘을 빌려 바다가 쏘아 올린 섬을우리는 사막이라 불렀다 물고기 비늘이 석양에 반짝이며 휘몰아치고 차도르를 쓴 바람이 � cafe.daum.net 2020. 8. 9.
여강에는 섬이 있다 / 김경성 여강에는 섬이 있다 / 김경성 여강에는 당신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섬이 있다 그 섬에는 붉은 발을 가진 새들이 몸을 내려놓으며 젖은 깃털을 말리고 이따금 밀려오는 파문이 섬까지 닿는다 강 건너편으로 가는 새들은 제 발목이 휘는지도 모르고 길고 긴 물그물을 하염없이 끌고 가다가 강둑에 걸쳐 놓는다 강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바람이 흘러가는 시간을 밀고 오면 강 속으로 뛰어든 구름이 몸을 풀어 감싸 안는다 강가에 서 있는 석탑의 깨진 지붕돌이 가라앉은 물속으로 뛰어드는 새 한 마리, 가장 아픈 시간의 조각을 물고 떠오른다 삼층석탑의 그림자가 물 위에 길게 드리워지며 그대로 섬이 된다 여강은 말없이 흐르고 새가 들어 올린 지붕돌 조각이 탑에 닿았는지 풍탁 소리가 번진다 바람이 분다 나도 당신.. 2020. 8. 9.
낯선 / 김경성 낯선 / 김경성 낯선 당신과 낯선 내가 마주치면 어떨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늙은 간이역처럼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낯선 나무를 향해서 걸었다 처음 불러 보는 나무와 자주 불러 주었던 꽃들이 뒤섞여서 낯선 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익숙함이 길 위에 펼쳐졌다 낯선 당신은 가까이 있고, 낯선 나는 멀리 있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해를 먹고, 달을 굴리는 사람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낯선을 입안에 넣고 궁굴렸는지 동그랗게 닳아버린 낯선이 나서는으로 바뀌었다 나는 길을 나서는 사람 저물녘 어린 새들이 흙 목욕을 하는지 밭고랑에 앉아서 흙먼지를 일으키고 수선화는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길 끝에 걸려있는 민들레가 날고 있다 나는 나에게서 더 낯설어져야겠다 - 『두레문학』 2020년 여름호 2020. 8. 9.
보라의 원적 / 김경성 보라의 원적 / 김경성 덧입혀진 색이 기울어져 있다 빛이 닿을 때마다 몸을 바꾸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달빛 머금은 그림자에 물이 고인다 그 무엇과 부딪쳐서 생긴 흔적이 문득문득 몸 언저리에 피어나서 몸 바깥으로 나있는 그림자의 길이 검붉었다 몸을 바꿔서 모서리가 되기로 했다 둥근 것들이 내는 소리가 부드러운 것만이 아니고 모서리가 내는 각지고 찔리는 소리도 모두 날카로운 것도 아니었다 가장 깊게 부딪친 곳에 중심을 두고 옅어지는 보라는 천천히 빠져나가고 어떤 상처는 눈물 번지듯 뼛속까지 들어가서 움직일 때마다 찌르레기 소리가 났다 더 깊게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 손차양을 하고 아득하게 바라보며 가늠할 뿐 여러 날이 지나야 사라지는 보라의 지문은 몸 안쪽에 고여 있던.. 2020.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