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김경성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다
구릉을 넘어온 눈보라가 마을까지 뒤덮을 때
물먹은 쐐기가 부풀어서
집채 만한 바위를 쪼갰다
어떤 규칙은 마음으로 정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마음을 맞대고 쌓아 올린 흙더미 위에
고인돌 상석을 올려놓자 사라져 가는
흔적들이 더 단단해졌다
쐐기가 박혔던 자리에서는
쇄골에 고인 봄볕 같은, 자목련 꽃봉오리만큼의
달의 즙이 고이고
차마 퍼내지 못해서 기울어진 낮달이
푸른 밤 속으로 들어가 있을 때
사람들은 별자리점을 치면서
고인돌 성혈에 떠 있는 달을 굴렸다
그때 사라졌던 마음들이 보름달이 되어 돌아와도
달그림자 농담濃淡의 깊이를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구멍
김경성
물 때를 기다릴 때
쑤욱 밀고 들어오는 손이 있다
숨구멍 하나 열어놓고
깊숙이 들여놓은 허공을 가시 발로 움켜주고 있어도
한 번 들어온 손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몸통이 짓이겨지도록 더듬거리는 손가락
집게발로 물고 나면
들여놓은 하늘도 사라지고
기다리는 것들은 쉬이 오지 않는다
뭉개진 구멍에 다시 물이 차오를 수 있을까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면
바이올린 닮은 집게 다리로 개펄을 연주하고 다닌다
바닷물이 멀리 떠난 새벽
거세게 몰아치던 사람들의 손도 사라지고
둥근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와 아침을 연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개펄 위에서 쉼 없이 연주를 한다
-계간 『시와문화』 2021년 가을호 <포커스 젊은 시 5인선>
세계를 마주 대하는 다섯 유형의 분투
장수철
김경성의 두 작품은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고인돌』은 지석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재구하는 화자의 미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집채 만한' 암괴에 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의 섬유질이 부풀어오르면서 바위를 깨트리는 원리로 덮개석을 얻는 과정, 그리고 양쪽 지주석을 흙에 묻고 덮개석을 끌어올려 고인돌을 완성시킬 떄까지의 과정을 상상하며 선인들이 망자를 추념하는 일련의 과정을 시적언어로 엮어낸다. 바타이유는, 죽은 들소 앞에 발기한 남성을 그려놓은 라스코 동굴 벽화의 일부에서 죽음과 성적 관능을 한데 묶어 이해한 바 있다. "쐐기를 박는" 행위는 그 자체로 물리적 수단이지만 원형적으로 성적 관능을 모사한다. 쐐기가 박혔던 자리마다 고인 "달의 즙", 상석에 패인 성혈에 떠 있는 달 등 성적 관능의 이미저리가 그 주변으로 분분히 늘어선다. 인간사를 관통하는 양극단, 즉 '죽음' 과 성적관능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수천 수만 년 전의 한 죽음에 대한 시적 상상 위에 오묘함과 신비감을 더해준다.
『고인돌』이 우주적이고 원형적인 신비에 대한 찬가라면 『구멍』은 개체적인 삶의 누추함 속에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의 엘레지이다. 개펄에 사는 '게'를 화자로 삼아 '숨구멍 하나 열어놓고', '몸통이 짓이겨지도록' 자신의 생명을 탐하는 위협의 손길을 피해가며 목숨을 연명하는 연약한 존재들의 구체적이고도 현장적인 통증을 회화적으로 그려낸다.
-장수철 2009년 월간《우리시》등단.《시와문화》편집위원
'丹野의 깃털펜 > 김경성 - 근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선영, 이훤ㅡ 『캘리로 읽은 시』/ 망고나무와 검은 돌 (0) | 2021.12.01 |
---|---|
외딴섬에서 하루 - 김경성 (0) | 2021.11.02 |
무언가 / 김경성 (0) | 2021.10.16 |
몽상가의 집 / 김경성 (0) | 2021.10.16 |
몽상가의 집 / 김경성 (0) | 2021.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