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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절벽 / 김기택

by 丹野 2025. 1. 16.


절벽

   김기택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수직을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무게와 높이에서 나오는 속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점점 작아지는 점을 향해 솟구치는 바닥의 반동을
아직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

아파트 베란다 난간 밖으로 나와
묵은 먼지를 시원하게 날려 보내던 이불이
흘깃,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제 무게에 16층 높이가 달라붙었다고 한다
허공을 차는 반동력에 느닷없이 가속도가 생겼다고 한다
이불을 꽉 쥐고 놓지 않던 두 손을
무게와 속도가 순식간에 낚아챘다고 한다
가벼움 먼지 같은 가벼움이 생긴 두 발은 저절로 떠올라
막막한 허공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다가 구조된 한 사내는
왜 뛰어내렸냐는 물음에
뛰어내린 적 없다고 그만 물어보라고 짜증 냈다고 한다
그냥 강물을 쳐다보았을 뿐이라고
다리 위에 서 있기만 했는데 강물이 저절로 올라온 거라고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

내려다보는 눈과 올려다보는 눈 사이
빨려 들어가는 것과 튀어 오르는 것 사이에
중력과 속력이 있다
수직 끝에서 파열하는 점 하나 그리고 암전
그 끌어당김의 고요한 중심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한 줄기 가늘고 적막한 직선의 내부를
홀린 듯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70주년 기념 특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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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낫이라는 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