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김기택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수직을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무게와 높이에서 나오는 속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점점 작아지는 점을 향해 솟구치는 바닥의 반동을
아직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 밖으로 나와
묵은 먼지를 시원하게 날려 보내던 이불이
흘깃,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제 무게에 16층 높이가 달라붙었다고 한다
허공을 차는 반동력에 느닷없이 가속도가 생겼다고 한다
이불을 꽉 쥐고 놓지 않던 두 손을
무게와 속도가 순식간에 낚아챘다고 한다
가벼움 먼지 같은 가벼움이 생긴 두 발은 저절로 떠올라
막막한 허공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다가 구조된 한 사내는
왜 뛰어내렸냐는 물음에
뛰어내린 적 없다고 그만 물어보라고 짜증 냈다고 한다
그냥 강물을 쳐다보았을 뿐이라고
다리 위에 서 있기만 했는데 강물이 저절로 올라온 거라고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내려다보는 눈과 올려다보는 눈 사이
빨려 들어가는 것과 튀어 오르는 것 사이에
중력과 속력이 있다
수직 끝에서 파열하는 점 하나 그리고 암전
그 끌어당김의 고요한 중심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한 줄기 가늘고 적막한 직선의 내부를
홀린 듯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70주년 기념 특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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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낫이라는 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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