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홍일표
컵은 깨지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그게 너였니?
컵은 컵을 떠나는 순간 제 이름을 지우고
전모를 보여준다
형상을 버린 마음들이 추상으로 흩어져 있다
다행히 컵에 대한 해석은 무한으로 이어진다
유리조각은 흉기가 되고
차갑고 투명한 별이 되기도 한다
흉기와 별을 동시에 품고 있던 컵의 과거를 조금씩 이해한다
식당 종업원이 달려와 컵의 유골을 수습한다
다시 컵으로 돌아가지 못할 몇 조각의 기억들, 어디선가 날개 다친 새가 날아와 입안에서 부서진 노래를 퉤퉤 뱉어낼 것 같다
그럴 수 있지
깨지기 쉬운 허공이니까
누구나 부서져서 돌아가는
장소니까
단숨에 일생을 고백한 컵처럼
눈앞에 없는
봄날의 조각 난 얼굴처럼
―계간 《시결》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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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동시집 『괴물이 될 테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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