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에 가기 위하여
송재학
유칼립투스 나무 그림자
백 미터 높이의 수피에는 오래된 상형문자가 빼곡하다
하지만 나는 비염 때문에 작은 화분을 들여놓고
낡고 오래된 책을 정리했다
피를 잉크로 사용했다는 서문, 광합성에 가까운 독후감, 꺾어버린 책등의 이름, 청춘을 자극했던 세로쓰기, 모래로 쌓은 둑 안에 해일처럼 가둔 마흔 살, 게으른 늙은 책, 글자가 너무 작아 낮달에 갇힌 문고본까지
언젠가 이 책들을 다시 읽겠다는 표정에는 초식동물의 긴 목이 있다
『시인학교』(김종삼 시집, 신현실사, 1977)와 『한국전후문제시집』(세계전후문학전집 8권, 신구문화사, 1961)을 함께 묶은 비닐 끈이 초현실주의에 매달린 것처럼
어디서나 우후루봉이 잘 보인다는
킬리만자로의 공허에 휩쓸려서 종일 책을 뒤적이다가
유리창의 사각형을 닮은 메모를 보았다
‘세계의 모서리에서 언제부터 은유로 남게 될 오늘’
—계간 《문학과 사회》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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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 시집 『얼음 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기억들』 『진흙 얼굴』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 『검은색』 『슬프다 플 끗헤 이슬』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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