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의 경첩 (외 2편)
조용미
연두의 돌쩌귀와 분홍의 경첩을 단 네 짝 여닫이문을 열고 그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만 허락할 수 있는 능수벚나무의 작은 방이라면,
띠살문의 불발기창으로 어른어른 사람들 지나는 기척이 났다
분홍의 주렴 안에 우리는 서 있고 연둣빛 리본은 봄비처럼 두 사람 위로 내려왔다
새잎과 꽃잎 섞인 긴 가지가 눈동자를 잠시 흔들었던 순간을 두고
당신과 나는 능수벚나무의 바깥으로 나왔다
분홍의 자객이 이듬해에도 찾아올 거라 당신이 믿고 있어 이 봄은 더욱 짧아졌다
초록의 어두운 부분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 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많은 초록의 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 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 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았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 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노랑에서 검정까지
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도로
숲은 팽창하고
긴 장마로 초록의 색상표는 완벽한 서사를 갖게 되었다
검은 초록과 연두가 섞여 있는 숲의 감정은 우레와 폭우에 숲의 나무들이 한 덩어리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다
금몽암
이곳의 들숨과 날숨, 이곳의 밀물과 썰물, 이곳의 마음과 마음, 이곳의 한기와 온기 사이
또 어디에 내가 자주 머물렀더라
어떤 때 네가 어느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지는지 알아차리는 첨예하고도 심심한 그 일이 좋았다
금몽암에 들어
파초 잎에
시를 쓴다
잠을 잘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다면 이 별은 전생이 분명하니 그만 건너뛰기로 한다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욕망과 아름다움이 잠복해 있다 우리를 다치게 한다
금몽암에 들러
알록달록한 달리아를
꺾어
다음 생을 준비한다
다친 자국마다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처럼 하얗게 꽃이 파고들었다 달리아는 혼처럼 나를 대한다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 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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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 『초록의 어두운 부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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