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골목 / 김병호

by 丹野 2024. 6. 11.

골목

​    김병호



하나씩 가져가세요​

피아노를 버리고 화분을 버리고 의자를 버리고​

당신은 오래오래 서성입니다​

울음에 그을린 얼굴로 우레와 폭우를 감춥니다​

잊어야 지켜지는 안부는 당신의 몫입니다​

발목이 얇고 입술이 얇은 당신은 낯설고 다정한 귓속말로 묻습니다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는 마음이 있냐고, 한낮에 겹겹의 별자리를 긋는 마음을 아냐고

돌연하고도 뜻밖인 자리에 당신의 뜨거운 숨처럼

아무런 궁리도 없이 그저 밀어내야 하는 당신의 눈빛만 반짝입니다

사랑을 용서해야 하는 마음을, 당신은 아직 모릅니다

마음에서 놓여날 수 없는, 이미 저편의 일입니다


          ㅡ계간 《시인시대》 2024년 봄호
--------------------
김병호 / 1971년 광주 출생.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詩로여는세상》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