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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적벽 외 2편 / 조용미

by 丹野 2024. 6. 5.

격벽 (외 2편)

​    조용미

​​

과거가 돌이킬 수 없이 달라지려면 현재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출렁여야 하는 걸까​

피사로의 그림 속 나무들처럼
서 있는 겨울

​색채를 만지면 감정이 자라난다​

붉고 푸른 색의 나무들처럼 가만 서 있어도 천천히 끓어오르는 온도가 있다​

언젠가는 마음을 만질 수 없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만다​

방사선이 지나간다, 머문다
없다
냄새도 색도 형태도​

아무렇지도 않다​

시간이 지나면 구토를 한다 안개상자를 만들어 그것의 흔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없다

과거가 돌이킬 수 없이 달라지려면 현재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풍덩풍덩







귀퉁이에도 귀가 내장되어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귀가 붙어 있는지 살펴볼까
귀퉁이에도 귀의 청력이 있을까
귀퉁이는 모서리,

몸에 납작하게 붙어 있거나 볼록 드러나 있는
귀는 뾰족하지 않고 모나지 않고
둥글다
둥근 소리들이 잘 들어오는 귀

물소리, 메아리, 종소리, 다정한 말들이
탄식이, 둥글둥글 도르르
굴러 들어온다
미역귀처럼 많은 귀를 가졌더라면
예민한 귀를 가진 너는 매 순간 기절했을 테지

빗소리에 오래 마음을 빼앗기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바람은 어떻게 미로 같은 귓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모든 안테나들이 다 뾰족하다면 이상할 거야

우리의 귀는 둥글다
귀 안으로 들어온 바람과 소리는 먼지처럼
안개처럼 햇빛처럼 설탕처럼
조금 뾰족해지지 이른 봄의 새싹들처럼



십일월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 쉬고 있는 걸
가만 듣는다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 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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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 『초록의 어두운 부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