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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당신이라는 제국 / 이병률

by 丹野 2024. 6. 18.

 당신이라는 제국

 

   이병률

 

 

 

   이 계절 몇 사람이 온 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 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시집 『바람의 사생활』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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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림들」 「그날엔」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이 있다. ‘시힘’ 동인이며 MBC 〈FM4U이소라의 음악도시〉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