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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쇄루우(灑淚雨)* (외 1편) / 최형심

by 丹野 2024. 6. 25.

쇄루우灑淚雨)* (외 1편)

    최형심



새벽에 비 내렸다. 마당에는 물먹은 시간이 차오르고 칠월에는 누구나 발목이 깊어진다.

여종들의 긴 하품이 종종걸음을 치며 지나가는 무화과나무 아래, 이름 모를 꽃들 다투어 피었다. 먼저 간 별을 따라 가붓이 비에 가닿는 마음……

담 안의 우물은 애써 고요하다.

비는 삼만삼천 자(尺)를 걸어와 때늦은 은초롱꽃 밝혀 둔 뒤란을 서성인다. 누룩뱀은 무화과나무 아래 꽃잎인 듯 허물을 벗는데

사월에 접지른 발목이 아리다.

빗발이 지붕을 건너와 수틀에 내려앉는다. 솔바람을 당겨 허공을 수놓으면 청풍(淸風)에 풀잎 스치는 소리, 꿈결인 듯 밀려드는 밀어……

꽃잎은 점점이 흩어지고 물은 점점 차올라 오래전 거문고 소리에 젖는다. 물배 채운 꽃들과 나란히 누운 목젖이 푸른 사내……

꿈속에 든 사람은 그게 꿈속인 줄 모른다.

먼 나라 들소들이 떼 지어 몰려오는지 날벌레들 살포시 물빛 날개를 서로 포갠다. 칠월은 천지간에 길을 트고

사립문 여닫는 소리에 내다보면 아무도 없다. 헤어질 적 잡은 손을 홀로 어루만지니 그늘 많은 별채의 일이 남 일 같아

심부름 온 사팔뜨기 할멈이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다 돌아갔다.

  
  *눈물 뿌리는 비, 칠월칠석 전후에 내리는 비



  한 장 꿈을 나눠 접어



   눈이 내리자 남자는 녹나무 그늘을 따서 말렸다. 강의 절반이 남쪽으로 다른 절반이 북쪽으로 흐르는 시기가 오기를 기다려 녹나무 그늘을 항아리에 넣었다. 낡은 초막이 별빛에 잠길 즈음 고개를 숙이고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는데

   좁은 항아리 입구를 지나고 나자 흙으로 빚은 말(言)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내야 했다. 얇은 녹나무 그늘 날개를 단 것들은 낱알처럼 멀리 날아가 흩어졌다. 태엽 시계의 춤이 푸른 선율로 흘러가고

   남자는 비의(秘儀)를 품은 시간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아 막 걷어낸 초저녁잠 한 겹을 덧입었다. 수요일에 사냥한 꿈, 푸른 비밀과 젖빛 밀어, 흰 종이배와 마주한 윤슬, 꿈결 무늬 바퀴 같은 것들 그의 깊은 잠 속으로 내리고

   꿈속에서 태어난 반쪽과 꿈 밖에서 태어난 반쪽이 등을 돌린 채 서로를 향해 끝없이 걸었다. 이윽고 가장 나이 많은 나무의 세 번째 영혼이 머무르는 달에 이르러 그는 깊은 잠 속에 초승달을 꽂아두고 어둠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고양이 실눈 사이로 비치는 삼라(森羅)의 가벼움이 남자의 몸 위에 덮였다. 진흙으로 빚은 고요가 들어와 나란히 누웠다. 이마에서 흰 머리카락이 눈발처럼 날렸고

   마침내 그는 몸에 커다란 구멍을 받아 적었다. 그림자만 남은 몸에 바람이 감겼다. 달빛 흉곽에서 청동 종소리 퍼지고 단단한 껍질을 껴입은 시간이 입구를 둥글게 막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천계(天界)가 그 안으로 내려왔다.



          ―계간 《다층》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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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부산 출생.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